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만남은 교회로 보나 소련으로 보나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것이다. 교황 자신이 70분 동안 고르바초프와의 단독 회담을 마치고 행한 연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만남은 과연 「풍부한 약속을 지닌、 서서히 성숙된 시대의 징표」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주장하며 종교말살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해온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공산주의를 강력하게 단죄해온 가톨릭교회의 최고 사목자인 교황을 방문한 것은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 이래 7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 만큼、 그 사실 자체가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선 과거 26년 동안 은밀히 그리고 인내와 끈기 있게 추진되어온 바티깐의 이른바 「동방정책」을 꼽지 않을수 없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가 까사롤리 몬시뇰 (현교황정 국무원장、 추기경) 로 하여금 2차 대전이래 공산주의 정권의 대두로
중단된 동구라파 여러 나라들과의 접촉을 재개하도록 한 이래 바티깐은 장기간의 박해와 적대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권과 진지하게 교섭을 벌여왔다.
특히 까사롤리 추기경은 국무원장 (수상) 에 임명된 이래 지난 10년 동안 교황측근에서 바티깐의 동방정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추진해왔다. 까사롤리 추기경은 동방정책과 관련하여 『자유를 빼앗기고 언제나 타협을 강요당하는 교회라도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제는 고르바초프 자신이 타협할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조용한 외교를 통해 다소의 활동공간이라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는 동구라파 여러 나라의 교회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으며 최근 세차게 일고 있는 개혁의 물결도 결코 바티깐의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1964년 이래 바티깐과 헝가리는 꾸준한 접촉을 해왔으며 올해 들어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플란드의 경우 공산당이 아직 정권을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금년에 주교 4명이 임명되었다.
작년 6월에는 소련의 그리스도교 전래 1천 주년을 기념하여 까사롤리 추기경을 단장으로 한 바티깐의 고위 대표단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교황의 친서를 전달한바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응답으로 소련정부는 금년 2월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 대성당을 교회에 반환하였고、 7월에는 백러시아 공화국의 민스크교구에 60년 만에 처음으로 교화의 주교임명을 허용하였으며 소련의 회에서는 종교의 자유 법안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85년 정권을 잡은 이래 고르바초프는 낙후된 국민경제수준을 향상시켜 사회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뻬레스트로이 (개편)와 글라스노스찌(개방)의 가치를 내걸고 자본주의적 제도를 도입하여 과감한 경제개혁과 아울러 정치 및 사회 분야에서의 민주화를 추진해오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르바초프로서는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서방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글라스노스찌(개방)정책이 명실상부한 것임을 서방에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교황을 방문하여 바티깐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교황의 소련 방문을 실현、 소련 내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음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음을 인식했다는 얘기다.
고르바초프의 교황 방문은 결국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마르크스ㆍ레닌주의와의 결별을 공식 선언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소련이 과거 70년 동안 추진해온 사회주의적 인간형(型)의 창조에 실패했음을 공인한 것이다. 레닌은 공산주의가 하느님이 필요 없는 무신론적 소련인을 창조하게 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소련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종교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련은 새로운 사회주의체제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고르바초프의 교황 방문은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종교적 열망을 억누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의 도입이 필요함을 인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교황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는 박해 속에서도 면면히 신앙을 이어온 소련의 가톨릭신자들이다. 평소유럽의 새로운 복음화를 강조하고 있는 교황으로서는 소련 및 그 영향권하에 있는 동구라파의 새로운 복음화야말로 중대한 과업이 아닐 수 없고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은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 3천 년대를 바라보는 교회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교황은 그의 연설에서 외교적 수사 없이 단도적 입장으로 「과거 수십 년 간 신앙 때문에 고통과 시련에 시달려온」 신앙인들、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종교의 자유는 가장 기본족인 인권임을 강조하고 현재 소련 의회에서 검토 중인 양심 (종교) 의 자유법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였다. 교황은 바티깐과 소련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가 필수 조건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교황에 이어 행한 연설에서 양심 (종교) 의 자유법이 곧 통과될 것임을 보장하면서 교황과의 회담에서 교황청과 소련 간의 관계를 공식화하는데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밝힌 점은 이 회담의 역사적 성과를 예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가 교황에게 소련을 방문토록 초청하였음을 밝힌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황은 고르바초프의 초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대변인을 통해 이를 수락할만한 사태의 진전을 강력히 희망하는 것을 밝히는데 그치고 있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교황의 소련방문을 초청한 사실을 공표했다. 그것은 교황이 희망하는 여건조성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여러해 전부터 논의되어온 교황의 소련방문이 지금껏 실현되지 않은 것은 소련에서의 교황의 방문지역에 대해 교황과 소련정부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낳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정부로서는 교황의 방문지역을 모스크바와 발트해 지역에 국한하려고 하는 반면 교황은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 지하교회의 신자들을 방문할 수 없는 한 소련을 방문할 의사가 없음을 공언해 왔기 때문이다. 교황은 1946년 이래 가톨릭교회가 불법화되어 러시아 정교회로 강제편입 된 수백만 가톨릭 신자들을 방문할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가톨릭교회를 합법화하는 것은 교황의 강력한 희망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가톨릭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 때문에 이에 대한 러시아정교회의 반대역시 만만치 않다. 고르바초프로서는 종교자유 문제만이 아니라 러시아정교회를 설득해야 하는 종교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하겠다.
연설에서 「교황의 집은 모든 민족들의 공동의 집」임을 밝힌 교황은 고르바초프가 그리스도교 1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련국민을 대표하여 베드로의 후계자를 방문한 것임을 지적、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의 정신적 성격과 배경을 강조하였다.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만남은 소련 내 모든 신앙인들、 가톨릭 신자들과 그 밖의 모든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미래를 위한 희망이요 현재 동구라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교황과 고르바초프의 만남은 무신론 정권의 대부인 소련의 공산주의 통치 72년이 지난 오늘、 역사는 마르크스ㆍ레닌의 편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 있음을 웅변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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