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르고 성당을 비웃는 사람들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며 누룩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혼돈과 갈등 속에서 가치의 혼란에 휩싸일 때 교회는 흑백을 분별하고 세상이 나아갈 길을 명쾌하게 제시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경제 ㆍ 사회 ㆍ 문화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공동생활 전반에 미친다.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양이 평양에서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을 때 대다수 신자들은 이 행위의 당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와 배경을 모르기 때문에 옳고 그른 분별이 불가능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창피한 것은 사연도 곡절도 설명하지 못하면서 잘했다 못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통일문제로 열을 올리다 신세를 망치는지、 어째서 안정된 직업의 교사들이 교원노조를 고집하다가 처자들을 남겨놓고 쇠고랑을 자초하는지 아예 알려하지를 않는다. 내 개인생활이나 교회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수고롭기 때문이다.
2백60만 신자의 절대다수는 이미 세상을 밝히는 빛이기는 커녕 바깥세상에서 타오르는 빛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어둠속에서 무엇들을 하고 있는가?
회수를 적어가며 신공을 바치고 주일이 되면 경건한 미사에 참여하면서 나와 가족들의 영달、 행운을 빌고 있는 것이다. 성당 일에 참여도하고 자선헌금도하고 죄짓기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천국에의 안주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농축산물의 수입개방이 어떻게 되던 추곡수매과정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어 아우성을 치던 내가 성화되고 천국 가는 일과는 상관이 없을 터이요 내 자식만 끼이지 않았다면 누가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던 그 까닭을 알아보려고 기웃거릴 이유가 없는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교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의 모습이 언제까지 용납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엄청난 시련과 혼란의 증폭을 체험하고 있다.
60년대 7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집회들은 단순한 독재타도 인권응호나 근로조건과 관련된 경제적 불만의 표시에 그쳤지만 80년대 후반의 오늘의 상황은 결코 지난날 사태의 예사로운 연장이 아니다.
반미로 나타나는 외세추방과 민족자주화、 통일과업의 정부독점반대、 군벌정치의 종식、 농업포기에 다다르고 있는 농업정책의 근본적 개혁、 독점자본주의 체재선상에서 곡예를 연출하는 정부의 노동정책분쇄 그리고 이른바 참교육을 통한 교육개혁 등 실로 미증유의 중대한 사태들이 각계 층의 전투적인 연계투쟁으로 그 국면을 확대해가고 있다.
이제야말로 사회구성체의 골격과 이른바 지배계급의 좌표가 혁명적 위협에 직면하는 듯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정부권력은 부분적 개선을 통한 회유적 적응과 검거、 봉쇄의 강압정책을 함께 구사하면서 체재존속을 기하고 있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절박 속에서도 교육받은 신자들이 사회와 이웃의 문제들을 알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앙이 초월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현세적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살아생전에 체험하여보지 못하는 천국은 환상적 의미 이상일수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만 인격적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가톨릭신자는 공동체생활 안에서 공동선을 앞장서 추구해야할 사명을 부과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처럼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하며 이웃을 위한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2차 바티깐공의회는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장) 에서 이점을 명백히 선포한다.
그리스도교신자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자신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며 정치적 문제들이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정치 분야에 있어서도 예수의 주권이 인정되도록 즉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하고 공부해야 한다. 제아무리 안 다해도 아는 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만 알지 아니하고서는 행동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나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웃의 고통、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관심은 이웃사랑과 인간애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니요 의무적인 의지적 노력 (아가페) 이기 때문에 읽고 사색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이것도 고통 (십자가)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3세기의 문을 여는 한국교회답게 그리고 빛나는 신앙선조들의 후예답게 우리는 세상이 바라고 교회가 원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하겠다.
국가보안법철폐를 호소하며 단식하는 사제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신자、 통일문제에 대한 주교단과 일부사제단의 상충되는 듯한 자세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신자、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혼란과 고뇌에 대하여 일가견을 피력할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신자들만이 세상을 비추는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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