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9세의 불구청년인 나는 경북 상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나는 처음엔 정상아였으나 소아마비를 앓게 되어 왼쪽팔과 다리를 못 쓰게 된데다가 말도 못하는 농아가 되었다.
내가 여섯 살 때 큰누나는 약 한 번 못쓴 채 죽었고, 아버지께서도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땅마지기의 농사일과 누에치기로 하루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다. 그 와중에도 불구인 나를 돌보셨다.
내가 열 살을 넘어서자 간신히 걸을 수 있었으니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때로는 방에 가둬놓기도 하고 들에 나가 일하실 때에는 끈으로 묶어 나무에 연결해 놓으셨다.
철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울기만 했었다. 나를 묶어놓으신 어머님이 야속해서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내 운명에 대한 울부짖음인지….
목욕을 시켜주시고 쉽게 입을 수 없었던 옷을 억지로 넣어주실 때 보았던 어머니의 눈물 맺힌 눈동자를 어렴풋이 떠올려 보며 그때 어머니의 비통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어머니는 짜증스러워 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으니 나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무척이나 애쓰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년이 흘러 나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입학해서 아침마다 학교에 간다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집에 있어야만 했다. 등교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문틈으로 보일 때면 속이 너무 상해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다. 몸은 불편해도 의식은 정상인에게 뒤질 것이 없었기에 보는 것이 모두 부럽고 듣는 것마다 괴로울 뿐이었다.
어머니도 학교에 벌써 입학했을 내가 집에 남아있는 것이 무척 안쓰럽고 괴로워하며 죄책감까지 느끼고 계셨던 것을 지금에야 알 수 있다. 이 학교 저 학교, 이 사람 저사람 만나 육체적으로 불구인 자식을 정신만은 불구로 만들 수 없다는 어머니의 집념은 마침내 어렵고 힘들었던 때였으나 이뤄졌다. 하지만 학교에 다닌다는 것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시고 학교가 끝날 때면 다시 오셔서 업고 와야만 하는 어머니의 그런 어려움을 알고 나니 차라리 학교를 그만둘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올 때는 이미 한낮이라 30℃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의 날씨 속에서 업혀오는 나 자신도 무척 곤혹스러웠으나 어머니의 고통이야 오죽했었을까? 축축하게 젖은 윗저고리를 보고 그 괴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학교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고 필요한 것들을 꼭꼭 챙겨주시던 어머니의 모습. 친구들을 부러운 듯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친구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걸어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매일 먼 길을 이 못난 자식업고 다니시는 어머니께 꼭 혼자 걷는 모습을 보여드려 어머니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학생들이 모두 나가고 없는 체육시간 같은 때는 혼자 교실에서 책상을 짚어가며 일어서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고, 집에 돌아와서도 열심히 걷는 연습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도와주었더라면 더 쉽게 더 빨리 걸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내 주위엔 도움 줄 만한 친구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어느 날 갑자기 걷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괴롭고 힘든 나날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벽을 짚으며 간신히 서다가, 벽을 따라 한발 한발 발을 떼다가, 드디어 벽을 짚지 않고 걷게 된 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부르며 얼싸안았다. 무한한 기쁨과 희망 속에, 다른 아이들처럼 홀로 집밖을 나설 수 있던 때도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얻어 운전하시던 큰형님께서 교통사고를 내어 우리 집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집 재산마저 모두 그 뒤치닥거리로 날리게 되어, 집안은 엉망이었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이제 늙으신 우리 어머니! 우리 5남매를 위해 일생을 바쳐 오신 분. 아니 우리 형들 보다는 나하나 때문에 일생을 송두리째 희생하신 분이라 그저 잘 모시고만 싶다.
어머니께서는 헬렌 켈러여사 이야기, 장애자 올림픽 등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나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헬렌 켈러 여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사람인데 그에 비하면 나는 하느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지금 인천 제물포 역전지하계단에서 12년째 껌 장사를 하며, 지난해 10월 8백만 원을 저축해 재무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그런데 한때는 우리 집의 가장으로 중요한 수입원이셨는데 이제 칠순이 되신 어머니는 저에게 있어 예나 지금이나 수호자이면서도 인도자 역할을 하시는 가장 소중하신 분이시다.
어머니의 여생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살면서 매순간 바치는 나의 기도는『주여! 한평생 비탄과 고통 속에서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에게 지상에서 고통이 천상에서의 영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항상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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