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 드물 것이다. 허다한 소설에서 허다한 여인상(女人像)을 발견하게 되지만 가장 인상적인 여성의 하나가 내게는 이광수의 <無情>에 나오는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다.
이광수는「無情」에 두 여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는 봉건적인 윤리를 대변하는 박영채요 또 하나는 1910년대 우리 사회에 있어서 비교적 새로운 여인으로 김선형을 등장시킨 것이다. 선형은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하여 영어를 배우려고 가정교사를 들일 만큼 개화된 집안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그녀에게는『아내가 되었으니까 남편을 사랑합니까. 또는 사랑하니까 아내가 됩니까』라는 말뜻을 깨닫지 못할 만큼 미자각적인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작자 이광수가「無情」이라는 작품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主題)로 다루게 된 것이 애정(愛情)의 자율성이요, 그 자각의 과정을 김선형을 통하여 보여 주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선형이가 오늘의 우리 사회의 젊은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봉건적인 낡은 윤리와 생활 속에 젖어 있는「고색창연한 여인상」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점은 나도 시인(是認)한다. 그럼에도 내가 김선형에게 끌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의 정숙한 몸가짐이다. 그 장면을 초록(抄錄)하면 형식(亨植·남주인공이다. 현재 경성학교 영어 교사요 선형의 영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이다)은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본즉 선형과 순애가 책과 연필을 들고 문 안에 들어와 섰다가 형식의 고개 듦을 기다려 은근하게 경례한다. 형식은 놀란 듯이 얼른 일어나 두 처녀에게 답례하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쾌활하게『오늘은 어제보다도 덥습니다』하고 선형과 순애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기도 양인과 상대하여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편다. (中路)
순애는 치마로 발을 가리우느라고 두어 번 몸을 들먹들먹하여 밑에 깔린 치마를 뺀다. 선형은 이마에 소스락소스락하게 구슬땀이 맺히어 이따금 치마 고름으로 가만히 씻고는 손으로 책상 밑에 부채질을 한다.
이것은「無情」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선형은 이마에 소스락소스락하게 구슬땀이 맺히어…』이하 끝까지 선형의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고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선형의 이와 같은 행동에서 나는 한국적인 여인다운 점을 강렬하게 실감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한국의 여성다움이란 한마디로 정숙(貞淑)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다. 책상 밑으로 부채질을 하는-이것은 여인만이 가지는 섬세한 조심성이요 이것이 그녀의 그윽한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은 봉건적인 사회 속에서 억압되고 강요된 것으로서의 정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정숙성은 이미 떨쳐버린 지 오래이다. 오히려 오늘날에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 활동적인 여인상일 수 있다. 당당하게 그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고 충분히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여인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 자신을 살리는 생활 태도가 결코 무절제한 방종이나 안하무인 격의 당돌이나 파렴치를 뜻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여성들이 자기를 주장하고 그 자신을 살리는 경우에도 여성적인 우아성과 섬세성-그들 자신에게 하늘이 베풀어 준 특질을 충분히 간직한 채 그 바탕에서 시대에적응하는 현대적인 여성으로서 탈바꿈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김선형의 정숙한 몸가짐에 일종의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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