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톨릭 교세 통계표를 보면 신자 78만 중 남자가 35만이고 여자가 43만이다. 단연 여자 신자가 수적으로 우세하다. 그래서 교회를 두고「여성의 교회」라고까지 부르는 모양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왜 교회에는 여자가 더 많은가 하는 이유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신부가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교회에 많이 나온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이것은 좀 피상적이다. 그리고 또 사회 인구에 여자가 더 많아서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한국 총인구 3천만 중 남자 50.2% 여자 49.8%) 교회에 여자 수가 많은 이유는 여성의 심리와 생활에서 오는 것이 있겠고 교회 자체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있겠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 받기를 원하고 또 인정되지 못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으로 불완전하다.
이 사실은 여성에 있어서는 더구나 더 뚜렷하다.
그렇지만 한국 여성의 경우를 보면 역사적으로 여성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올바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가족제도와 사회제도에서 소외되었고 또 피해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또 가정적인 불화나 화가 일어났을 때 남편 되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정 테두리 밖에서 찾을 수 있으나 부인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또 종래 한국 사상은 남편이 부인을 인정해 주는 것을 불미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어떤 고등교육을 받은 가정주부는『내가 아무리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더라도 그건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남편이 내가 할 일을 보아 주지 않을 때 나의 피로는 백 배 천 배 더하여 삶의 의욕을 다 잃어 버립니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어려움이란 형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심리적 위기를 모면키 위해서 찾아 두드리는 문이 교회의 문이라고 생각하며 현 사회의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여자가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는 생활 면에서의 이유는 남자보다 시간적 여유가 좀더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잘 관찰해 보면 여성이 반드시 더 한가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 자체는 어떤가? 여성만을 상대해 오면 교회여서 그런지 미신적이고 감정으로 좌우되고 비활동적이고 의타적이며 한마디로 말해서 소극적이다. 그 안에서 남성들은 활기를 잊고 개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여성들은 교회를 제 집을 생각하지만 남성들은 남의 집에 온 기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가르치고 생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역시 사랑을 주로 가르친다. 남성과 여성을 두고볼 때 사랑에 민감한 편은 역시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이 더 쉽게 교회에 나오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 현상의 원인을 추구해본 우리는 이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신 하느님께서는 여성을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먼저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통치권을 남자에게 맡기시지 않으시고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에게 에와를 주신 하느님은 에와를 아담의 부족으로나 소유로 주시지 않으시고 동반자로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쾌락의 도구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성에게만의 모독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도 동정이신 마리아를 어머니로 택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속의 계획 속에서 여성을 정결한 동정으로 남성의 배우자로 인류의 어머니로서 규정해 주셨다. 우리도 여성의 진상을 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정결한 여성, 남을 받들고 도울 줄 아는 동반자로서의 여성, 자녀를 낳고 교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안에 여성의 모든 아름다움과 자질이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자질의 표현 방법은 역사가 변하듯이 변천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나 본질은 변치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상에 비추어서 교회는 앞으로 여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여기에서 무엇보다 먼저 성직자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교회에 나오는 여성들에게 올바른 신앙교육을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거저 위로만 해 준다든지 미신적인 종교생활로 이끌어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이용 가치로서 행사 때 치닥거리를 맡아 주는 사람으로 이용하는 것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실상 성직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여성교육을 위해 가장 호조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성의 자질 향상을 위해 적극 노력해 줘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가톨릭 남성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자기 욕심만 차리든지 자기 편리만을 찾지 말고 여성의 위치를 올바로 인정해 주고 인격으로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달라는 것이다. 여성 해방문제가 이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여성은 해방보다는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남성은 여성을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여성도 인정 받음으로써 존재의 의의를 충분히 느끼고 따라서 해방되는 것이며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지상의 소명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육교이란 점이다. 이 교육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와 교회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찾아야 할 것이며 또 여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격언에『남자는 건설하고 여자는 건설한 것을 보존한다』고 하며『남자는 벌고 여자는 쓴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교회에서도 충실히 이행해야 할 것이다. 신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2백 년에 가까우며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현대 여성들은 이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상생활 속에 신앙을 이끌어 가도록 즉 가족생활과 도덕생활을 신앙 면에서 영위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여성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단체훈련이라 하겠다. 개별적으로는 훌륭하나 모이면 분열하는 우리가 아닌가. 대를 위해서는 소를 죽일 줄 알고 공동 목표를 위해서 협동하는 정신을 우리는 길러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운동의 목적인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 사랑에 가장 민감한 여성은 바로 이 사랑으로 인류에 봉사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에 참여하여야 할 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의 여성의 위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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