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바티깐을 방문、 교황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기 부인에게『이 분이 교황님이오』하고 소개해 주었다. 소련으로서는 이 말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만큼이나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그날의 정상회담은 바티깐과 소련간의 불편했던 지난날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요즘 들어서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는 느낌이다. 갈라졌던 나라들이 가까와지고、 양분되었던 거대한 동서가 과거 어느 때보다 화해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지구가족」이라는 말이 매우 실감나게 들린다.
그렇다면 어제까지만 해도 세계가 안고 있었던 재앙 중의 하나인 군비경쟁ㆍ냉전시대는 과연 종지부를 찍은 것인가? 얼마 전부터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회가 불신과 증오의 불씨를 안고 있는 한、 낙관적으로만 미래를 점칠 수는 없다.
초강대국의 대결、 남북의 분단、 그 밖의 크고 작은 분열들은 과연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점은 정치 사회 군사 등의 제반 요소들을 역사 속에 조명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분열들은 아우구스띠누스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인간마음의 이원성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사실을「신국론」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저술에서 말해지는 두개의 나라는 지리적ㆍ공간적 실재도 아니며 종족과 집단에 국경이 그어진 나라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고유한「나」라는 대륙에 상이한 지역을 형성하는 것들로서 서로 연관되기 보다는 흔히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나라이다. 이것은 스코투스가 말하는「신의 능력」인 인간의 마음에 악이 깊숙이 뿌리박고 있음을 뜻하며 아직도 이기주의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인간 성패의 근원은「나」에게 달려있다. 자기인「나」와의 근원적인 화해의 실패는 개별인간 안에서 분열을 가져오며 그러한 분열은 작은 집단에서 즉각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복잡한 인간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세계 안에서도 발견된다.
왜냐하면 내적 분열은 필연적으로 외적 분열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와의 화해、 즉 내적일치는 모든 것과의 화해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내적 일치를 도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악을 멀리하고 이기주의나 독단적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으려 힘쓴다.
또한 제도와 이념을 초월하여 마음을 변화시키고 재창조 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자들이다.
불란서 사상가 삐에르 코사드는 인간의 마음이 세계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즉 사람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그러한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고 확신하였다. 결국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그를 재창조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눈앞에 다가왔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인류의 전적인 화해인 성탄을 맞아 그분의 거처를 각자의 마음속에 마련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래야만 성탄절도 뜻깊게 보낼 수 있고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도 올바로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맞아들일 각자의 마음은 다름 아닌 내적 일치를 이룬 마음이다. 그렇게 되면『이 분이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유효한 고백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같이 고백되는 성탄의 신비 안에서 그분은「나」와의 화해뿐만 아니라「너」와의 화해、 하느님과의 화해에 충만한 은총을 선사하신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기저기에서 세대간、 계층 간、 노사 간…간의 갈등이 멎지않고 있다.
「너」와의 화해 역시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이다. 서로가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구체적이며 개체적인「너」라는 인격을 믿는 풍토가 이 땅에 정착됨이 급선무일 것이다.
인간세계의 체제나 구조는 다시금 비인간성과 잔악함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원인으로 전환하기 이전의 결과들이다. 「너」와의 화해는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점과 약점、 밝은 면과 어두운 면、 가치와 무가치를 함께 받아들여 인격화함이다. 그 결과「너」에 대한 불신과 증오감은 사라지고 신뢰와 애정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와서 인간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려는 몇몇 영웅적인 지도자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세계의 변화를 위한 기본적인 자격이 인간 마음의 변화라는 것을 믿어 근원적인 화해의 디딤돌을 마련하는 점이며 이를 발판으로 이웃과의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이룩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해에는 모든 이가 친밀감과 형제애가 넘치는 하나된 세계 안에서 보다 밝고 힘찬 나날들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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