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을 업으로 하는 소위 방송극 작가라는 직업은 언제나 바쁘다. 그 바쁜 이유는 쓰고 싶은 것을 쓰기보다는 애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는 역사극을 거의 전문으로 쓰는 터이라서 무슨 작품을 쓰든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니 말이다.
현대극 같으면 이런 군일은 없을 것이나 역사극에서는 등장 인물의 행적이며 당시의 제도와 풍습을 확인해야 하고 그때 그 시절의 특징 같은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쓰는 시간보다 알려고 애쓰는 시간이 더욱 길고 때로는 먼 지방에도 가야 하니 시간이 금쪽 같이 여겨진다. 게다가 타고 난 성미가 알 것을 다 알고 메모가 충분하지 못하면 애당초 붓도 들고 싶지 으니 딱한 노릇이다.
고적을 찾아가 보는 일은 그래도 수월하다.
언제든지 가기만 하면 볼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산 증인을 만나서 물어보려는 데는 상대방을 포착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번 가서 못 만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찾아가기란 수월치 않다. 게다가 카메라를 가지고 찍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는 분의 입을 빌어 녹음을 하는 경우 숱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이런 일을 거의 쉬지 않고 행하는 나에게는 여가라는 것은 거의 없는 셈이다. 어느 때는『내 왜 하필이면 역사극을 쓰려고 하는고…』
탄식도 해 본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흐뭇한 일이요 더욱이 수입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자녀의 교육비를 물게 되니 무슨 딴소리를 할까 보냐. 그래서 나는 여가는 거의 없는 셈이다.
카메라를 메고 거리고 나서면 팔자 좋게 놀러 나선 것 같이 보이겠지만 그 실은 고적을 찾아가는 길이나 어이가 없다.
고적 탐사에는 휴대품도 적지 않아서 카메라 녹음기 참고 메모 때로는 지도까지 지니고 나서면 꼭 무전여행 다니는 방랑객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즐겁고 보람찬 한때이다. 게다가 만일 찾아간 곳에서 미처 생각지도 않은 좋은 사료(史料)라도 나요면 그 기쁨은 자못 크다. 10년 그리던 애인이나 만난 듯이 마냥 흐뭇하다. 그러니까 남이 보면 자못 여가에 묻혀서 사는 사람 같으나 그실은 한창 바쁘게 일을 하는 것이니 직업치고는 야릇한 것 같다.
지난 번 사극을 쓸 때 선조(宣祖)의 아드님으로 어려서 형님(光海君)의 손에 무참하게 죽어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묘(墓)를 찾으려고 여러 달 애를 쓴 일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은 여가가 많아서 공연히 나도는 것 같이 보였으리라.
그러나 나로서는 한창 애를 쓰고 헤매는 실정이니 신세 한탄마저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나에게는 여가가 없다지만 잔뜩 밀렸던 원고가 겨우 끝나고 하루쯤 쉬게 되면 그야말로 나에게는 신나는 시간이다. 이런 때는 주로 다방(茶房)을 찾는다. 종로 일대에는 노인(老人)이 모이는 다방이 몇 집 있어서 틈만 있으면 찾아간다. 그분들 곁에 앉아 있으면 무엇이고 한 가지 얻는 게 있고 배우는 것이 있다. 여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에게 여가는 한가한 틈이 아니라 금쪽 같이 귀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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