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알고 있는 종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란 뜻은 자연히 그리스도교만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유모어(HUMOUR)와 유모리스크(HUMORISQUE)한 성격이 발견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물론 이것은 내가 보는 견지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내가 읽은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그스도께서 웃으셨다는 구절을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밤에, 피와 땀과 눈물이 얼굴을 적신 고뇌와 비극의 모습을 우리는 연상을 할 수 있지만 해학적인 기지로써 인간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교는 그 역사에 있어서 수난과 박해와 순교의 지속인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교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또 때로는 차분한 평화의 영상을 볼 수는 있지만 익살과 풍자로써 짜여진 여백(餘白)과 여우의 제스추어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교의 생명은 죄와 절망과 비탄 속에서 은총과 희망과 기쁨의 찬송을 갈구하는 도상의 철학이다. 그의 도상위간에서 매순 매순간이 영원이냐 아니면 파멸이냐 하는 숨가쁜 결단의 시간이기 때문에 자기의 날에 여백의 공간을 만드는 그런 여행자의 멋은 그리스도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스도人이 체험하는 여정(旅程)은 맨발로 가는 순례자의 고행이지, 이곳저곳을 발걸음 가는 데로 살펴서 음미하는 김삿갓의 방랑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1차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유모리스끄한(HUMORISQUE) 요소를 보기 어렵다면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적인 유모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일까?
프랑스의 시인인 브르똥(BRETON)이 다음과 같이 유모어에 관한 의미를 간절하게 그러나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유모어란 행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숭고하고 고양된 어떤 것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확실히 내가 체험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실재와 현실을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러나 천박하지 않게 파내는 정신의 형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파라독스와 상의적인 안목의 전도 속에서 나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어떤 유모어적인 계기를 정신적인 지평에서 느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의 사상적 깊이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종교, 그리스도교의 종교를 너무 지나치게 윤리적인 각도에서만 해석하면 율법과 계명의 준수를 위한 형식의 도덕적 범주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으로서도 충분히 종교 없는 착한 마음의 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지니고 있는 유모어는 이와 같은 착한 마음의 윤리적 생활과 그 생활의 진지한 태도가 흔들리게 될 때 생기는 것이다. 윤리적인 태도가 흔들리게 된다고 함은 의무와 그 의무의 보상에 대한 합리적인 기다림이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단순한 영혼의 모습처럼 생각될 때이다. 마치 다른 여자를 일체 생각하지 않는 착한 남편이 자기의 충실한 의무에 대하여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어떤 보상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때 그 남편은 자기가 참으로 훌륭하고 착한 지아비처럼 느끼며 삶의 행복에 취하는 것이다. 또 그러한 자기 태도가 가장 신앙의 본질을 실천하는 것 같이 자부하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도 불조리한 회오리바람이 덮치는 날이면 그는 모든 것 심지어 신앙까지도 잃고 만다. 불조리의 회오리 바람에서 신을 알 때 비로소 그는 그의 우직한 윤리적 생이 얼마나 딱딱한 마음이었는가 깨달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의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다. 종교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착각한 사람은 결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이것이 유모어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써만 신의 율법을 지키는 굳은 생활 태도를 넘어서 해방된, 그리고 활달하게 열려진 마음의 여유가 있으리라. 그런 유모러스한 태도 속에서는 죄를 짓게 될까 어쩔까 하는 경련된 수축보다는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은총의 맛에서 죄냐 아니냐는 긴장보다는 빛처럼 방사하는 너그러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언제나 동양화의 여백보다는 루오의 그림처럼 긴장감이 서려 있음을 본다. 유모어적인 감정에서 그리스도교가 출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감정은 종말론의 세계를 벗어난 천국의 여유에서 마지막으로 솟아오르는 멋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긴장감이 주는 분위기에서 유모어의 풍토가 부족한 것에 동양인으로서 아쉬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브르똥이 말한 해방과 숭고의 느낌을 이 지상의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늘의 선물로써 마중할 수 있는 기다림으로 마음이 차츰 열려지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