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無知의 知」의 자각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철학이라 했다.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이 知에 대한 절실한 공허 내지 결핍의 자각이 되고, 따라서 참지식에 대한 맹렬한 갈망과 정열을 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르긴 하지만 그 모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선 다른 유식한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현명하더란 것이다. 이것은 철학 입문서쯤엔 어디서나 흔히 뜨이는 얘기다. ▲신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란 것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인간이 신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명약관화한 해답으로 이해하려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태도도 없을 터이다. 인간 인식의 범주 속에 쏙 들어오는 신의 이미 신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천주를 알지 못함을 알기, 이것이 신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라 천명했었다. ▲그런데 이외에도 우리 동네에는 신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탈이다. 사람마다 생과 의미를 보는 안목에 따라 약간씩 관념이 다를 수도 있겠는데, 유독 자기 것만 옳다는 독선에 빠진다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다. 소크라테스나 토마스보다 더 현명한 인간이거나 아니면 기본적인 자세조차 안 돼먹은 맹목의 우자거나 그 둘 중에 하나일 테니 말이다. ▲특히 위험천만한 것은 병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에 빠진 상태다. 신이 마치 흉측한 강도나 되는 듯, 또는 걸핏하면 뾰족침을 쏘아대는 소갈머리 좁은 계집이나 되는 듯, 내내 전전긍긍하는 우스운 결벽이다.『어딘가가 맹꽁이』라고 천주교 신자를 혹평해대는 세간 사람들의 말이 그쯤되면 결코 근거 없는 소리가 못 되는 것이다.
▲신앙의 중핵은 무엇보다 실천일 게다. 타와 섞일 줄도 활짝 웃을 줄도 모를 뿐더러 그들보다 더 편협하고 옹졸하기만 하다면 도대체가 너무 창피한 이야기다. 스스로의 유치한 사유의 울 안에다 신을 감금해선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자아를 확장하여 되도록이면 넓게 하느님을 수용할 일이다. 모르지만, 참으로 모르긴 하지만, 성실한 물음의 연속 속에서 조금씩은 해답의 청명함도 만나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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