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교회 내에 나도는 표현 중에「사제 재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표현이 그렇지만 특히 유행어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고 감정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교회가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들이 우리를 사목해 오다 이제 차츰 독립 체계를 갖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프랑스 선교사들이나 그 외 외국인 선교사들이 성직을 미끼로 어느 정도 독재적인 사목을 해 온 것도 사실이며 방인사제들도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목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는 차차 민주주의의 이념을 찾게 되고 외국의 사조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계몽의 첨단을 걷게 되었고 비판의 눈이 상당이 날카로워졌다. 따라서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사제들의 교훈에 대해서나 사제들의 언행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게 됨과 동시에 사제들에게 더 많은 성덕과 지식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사제 재교육」이라는 말이 나온것 같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보아서는 성직자를 무시하고 불신하는 소위「안티끌레리까리즘」(반성직자 운동) 이 싹텄다. 그래서「사제교육」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멸시하는 감정이 잠재돼 있기 때문에 사제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할 것 같다.「사제 재교육」이란 표현은 사제들이 비록 장기간 교육을 받았지만 부족한 무엇이 있으니 다시 교육을 받으라는뜻이 포함되어 있음과 동시에 현 사제들의 좋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사제 재교육」을 주장하는 주교나 신부나 평신도는 누가 사제를 재교육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실상 누가 사제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자찬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대학 교수들을 보라!「교수 재교육」이란 표현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네 학식을 높이기 위해서 연수회를 갖거나 심포지움을 개최한다. 교수들은 자신이 자기들의 교육자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제들에게 있어서도「사제 재교육」이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자신들이 영신과 지식을 배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가장 첫째 되는 조건은 성덕과 지식을 배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 면에 있어 너무도 박식하다. 그래서 사제들이 신학교 시절에 배운 것을 다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어떻게 더 배워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겠는가? 사제들에게 좋은 의미에서 지식으로도 전함이 필요하며 자극함이 중요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더 알고 싶어하는 의욕이 없을 때는 사제들에게 어떠한 의욕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한 본당에서 1천 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사회 정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본당신부에게 요구했다면 그 본당신부는 열심히 연구해서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둘째로 사제들이 면학의 의욕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사제들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현 상황을 보면 사제서품만 되면 인생의 목표가 확정되었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진다. 사제서품은 인생 종착역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실제 사조가 그럴 때는 말로써가 아닌 제도로써 사제서품과 동시에 새로운 목표 설정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일반 사회에는 여러 가지 계급이 있어 한 개인이 자기 생활의 기반을 조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조교에서 주교수, 주교수에서 교수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가지 자격증과 조건을 채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어떤 형식의 경쟁이든 한 번 고려해야 할 줄 믿는다. 이러한 뚜렷한 제도가 없을 땐 승진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면학의 의욕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선의의 경쟁을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은 사제 성소가 많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끝으로 사제들이 면학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면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제19항에 명백히 지시되어 있다.『각 지역 환경에 적합한 강습회나 대회의 개최, 사목연구소의 설치, 도서관의 설립, 적임자의 연구 지도 등이다』우리나라의 어느 교구에도 사제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제들의 집이나 도서관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다. 오히려 사제들이 모이면 갈 곳이 없을 때가 더 많다는 이야기다. 사제들을 이러한 상황 속에 두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소치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영웅적인 사목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몇몇 사제들은 의욕 상실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사제들에게 무죄만을 선포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의욕 상실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백 배 노력해야 할 것이고 만일 누구든지 의욕을 상실했다면 하늘나라의 일꾼으로는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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