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보건법에 대한 가톨릭 주교단의 사목교서를 보고」라는 부제가 붙은 「양심과 신앙과 법」(조선일보 7월27일 문화시평>을 읽고 적어보려고 했던 것이 곧 이어서 김몽은 신부의 「멍군」하는 반론이 번개같이 나타났을뿐 아니라 이에대한 새로운 「장군」하는 더 큰소리가 벼락처럼 들려오고 또 빈틈없이 「멍군」으로 응수했기 때문에 나는 뜻하지 않게 옆에서 관직평(觀職評)같은 것을 쓰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덩어리지만 모자보건법이라는 것만큼 복잡하게 여러가지 현실이 얽히고설킨 경우도 드물것이다. 그것은 명칭 그대로 단순한 보건문제가 아니라 임신 출산 가족계획 임신중절 단종수술 등 직접적으로 인간생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현실과 20세기의 최대의 십자가라고 할수 있는 성문제와 인구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법률과 도덕과 종교가 서로서로 삼각형의 일변을 이루고있는 관계처럼 되어있어서 어느 한편을 치중하거나 소홀히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근본부터 인간을 파괴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가톨릭교회는 주교단의 이름으로 누차에 걸쳐 인간인명의 존엄성을 위해서 이 법을 도덕과 종교에 위배되지 않게 제정하기를 관계 요로에 호소했던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러나 이 호소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모자보건법이라는 부도덕하고 반종교적인 악법이 제정되고 말자 주교단은 최후의 수단으로 선량한 양떼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사목교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논쟁의 장기판에서 첫번 「장군」이 주로 공격한 점은 「양심」이었고 양심은 법에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같이 보였다.
『만약에 모자보건법에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를 가상한다면 이 나라 수십만의 가톨릭 신자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이 될 그들 자손인 가톨릭 신자는 양심 때문에 전과자의 낙인을 받아도 좋단 말인가?』하고 반문하면서 『이러한 비극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금할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두려운 비극은 이미 이 법이 제정되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는것이다. 국민의 3%도 못되는 가톨릭 신도들이 전과자의 낙인을 받아서가 아니라 나머지 97%의 국민들이 양심적으로 아무런 꺼리낌없이 존엄한 모자의 생사를 양심에 반하는 오로지 인위적인 기준에의해서 초개처럼 다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법률제정의 민주주의적 절차를 내세우고 있으나 도덕과 종교의 원리 즉 자연법은 다수결원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우리는 양심을 제거한 법률만의 평화보다 양심과 법률이 참으로 일치하는 진리속의 평화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솔직한 수긍과 공감을 다음구절 에 대해서 표시하지 않을수 없다. 『나의 양심만 참 양심이고 남의 양심은 거짓 양심이라하는 생각은 하느님과의 관계인 신앙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너와 내가 함께사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목선으로 규탄될 가능성마저 있는것이다』나는 여기서 논평자의 종교관 내지는 인간관을 시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당한 주장이라고도 생각지 않지만 그 문맥에서 풍기는 뜻을 그대로 수긍하고 공감하고 싶은 것이다.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하기보다도 장기판의 승패를 초월해서 이 발언의 참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공개적으로 사회인사로부터 이러한 솔직한 평을 듣기란 그리 많지 못할 것이며 아첨하고 아부하는 달콤한 말보다 귀에 거슬리겠지만 진실을 포착하는 거울이 될수도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교단의 사목교서가 사회인들에게 어떠한 뜻에서든지 독선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서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변명하기 보다는 허심하게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에 영광을 들리는 방향일것이다. 왜냐하면 독선이라는 것은 교회의 진리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를 다루는 인간의 약점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조상이 세상에 없는 명가문이라고 해보아도 그것만으로는 현재 자기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을것이다. 독선이란 어떠한 착각에서 생기는 것이아닐까.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려고 한 일이 독선으로 보였다면 사회에 대한 봉사가 뒷받침을 하지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독선 이전에 이미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고립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체득하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언제 가톨릭교회가 『내 양심만 참 양심이고 남의 양심은 거짓 양심이다』라는 주장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느냐고 반문할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한사람도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이라는 것이 만인의 진리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가톨릭」 「우리 순교자」 「우리 교우」라고 할 때 「우리」라고 하는데 혹시라도 액센트가 강하게 가면 그런 모순에 빠질 위험이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첫번째 「멍군」에서 「우리 가톨릭」의양심 「우리 교회 2천년 역사」 「우리 순교자」는 「우리」때문에 불발탄이 되었고 다만 「양심은 법보다 앞서고」 「악법은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주장은 적중안타였다고 본다.
그래서 제2 「장군」에서는 이 두가지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고, 악법이거든 개폐투쟁을 해야 마땅하고, 악법이라도 일단 제정된 것이니까 준수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화살을 돌렸다. 제2 「멍군」에서 자연법에 대한 성토마스의 원리를 보여준 것은 대단히 적절했으며, 쏘크라테스는 악법의 순교자적인 희생자라는 해석은 누구나 찬성할 것이다. 참으로 「악법도 법인 이상 지켜야 한다」라는 주장을 쏘크라테스와 같은 영혼불멸에 대한 확신없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잔인한 위선이다. 그리스도교도들을 학살하던 역사상의 모든 악법, 자유를 말살하는 공산국가들의 악법 이런 악법들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슨뜻인지 궁금하다 『카이자의 것은 카이자에게로』라는 예수의 말씀을 마치 악법도 지키라는 권고처럼 인용한 것은 대단히 잘못이라고 하겠으나 이 말씀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과 분리시키면 무의미한 것이다. 대체로 모든 오진과 비극은 이것을 분리시키는데 있으며 세상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이 서면을 일치시키는데 있을것이다.
자연에만 봉사하면 자연마저 상실하듯이 초자연에만 봉사하려들면 자연뿐아니라 초대연(超大然)마저 상실하는 결과가 되기때문이다. 이번 장기판의 쟁점도 하나는 「카이자」쪽에 치중했고 하나는 하느님 쪽에 치중하는 사상적 배경에 있다고 보겠다. 이번 논쟁은 신사적이었고 서로 의견이 많이 접근되었으며 문제의 소재도 차츰 명확히 되어가고 있는데 한편에서 장기판을 털고 일어서듯이 일방적으로 기권을 선언한 것은 유감스럽다. 오히려 이런 기회에 모자보건법의 독소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헤쳐서 교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길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이끌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더욱 전문적으로 세분해서 생물학 정치ㆍ경제ㆍ사회ㆍ그리고 철학 신학 등 각 방면에서 대화를 통해서 분석하고 토론해 보는 것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좋은 방법은 또다시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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