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대사관」과「칠성각」사이를 끊어 그렇게 아슬아슬했던 통근길이 일방통행로로 넓혀져 안도의 숨을 쉬게 됐다. 도시계획이 발표되자「문화재 관리국」이나 학자, 일반의 찬반의 여론이 분분했으나 결국「칠성각」을 뒤로 미루고 길이 난 것이다. 얕은 소견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길이 완성된 지 일 년이 넘도록 뾰족한 담 모퉁이가 길 한복판을 차지한 채 그대로 있다. 그 담이 바로「교황 대사관」것이란 점에서 아침 저녁으로 내 무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국제관계와 국제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배려 없는 안목으로 처리한 위정자를 책해 보기도 해 봤고 대사관 측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강조도 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허허한 자신의 마음을 어쩔 수 없다.『왠 세도가의 집이기에 길 한복판을 담 모퉁이로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느냐. 길을 막고 집을 짓는 귀하신 몸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하고 불평을 토로하는 행인은 없을까.『대체 누구의 집이냐? 』하고 던지던 분노의 눈길이「교황 대사관」이란 팻말에 머물렀을 때 시정의 졸열함만을 탓할까. 우선 아니꼽고 역겨워지는 마음이 되지는 않을까? 뾰족한 담모퉁이처럼 가톨릭을 보고 등을 대는 사람은 없을까? 『되지 못한 것들, 남의 나라를 없수이 봐도 분수가 있지 그래 가톨릭의 복음정신이란 게 그렇게 옹졸한 것이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신 사랑의 증표가 겨우 이런 것이었단 말이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식의 타성이나 내것 다 내가 갖고 편하고 이로운 것 내가 차지하는 것이「사랑과 봉사」는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살과 피를 저며내는 고통과 슬픔을 참고 넘어가는 폭 넓은 자세가「용서」일 것이요, 스스로 억울하고 밑지는지를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진실로「사랑」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요긴하고 아쉬울 때는「사랑」이요 부담이 가거나 불리할 때는 모르노라 돌아서는 교활한 태도는 벗어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런 습성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참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 이웃을 그렇게 모른 척하고도 하느님을 사랑하라 한다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테니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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