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금세기의 특을 격동하는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고, 그 원인은 서양의 되지 못한 과학과 물질문명에 있다고 해 왔다. 이에 비하며 교회의 진리는 확고부동하고 영원불변의 유일무이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생활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탄의 출현과 2차대전 종결 이후 과학 기술은 더욱 그 속도를 가해서 아폴로 11호의 월세계 정복과 인체 장기 이식 성공 등으로 대표되는 경이적인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구 폭발, 학생 집단 위력화, 도시 집중에서 오는 공해문제 등 사회, 정치 경제 등 새로운 문제가 인간생활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고 외적으로 내적으로 격변과 돌진을 거듭하여 새로운 질서와 조화가 체실히 요구되게 되었다. 여기에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이번 공의회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붕괴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갈릴레오 이후의 근대적 과학의 모든 문제와 말틴 루터에서 출발된 종교개혁 이후의 근대적인 사상의 모든 분야에 걸려 있던 수많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것을 초극하여 더욱 본질적인 근원에로 복귀하는 현명을 충분히 발휘하여 다시 한 번 웅대한 인류의 미래상을 새로운 지평선상에 제시한 것이다.
이번 공의회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교회 내의「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요한 23세 교황)라고 한다면 공의회가 여러 가지 혁신은 단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그 과정에 수많은 혼란과 문제가 수반되리라는 것은 예상 못할 바가아니다. 급진, 보수, 타협, 탈선, 악용 등의 엇갈린 혼선을 우리는 직접으로 눈 앞에 체험중에 있는 것이다. 교회 전례의 혁신, 도그마의 발전, 인구문제, 결혼과 이혼, 사제의 독신문제, 교회일치 문제 등 실로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점에 우리는 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새로운 교회상, 새로운 사제상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한 중에도 새로운 사제상을 확립하기 위한「사제 양성」의 문제는 가장 중대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제는「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점에서 교회의 핵심이며 지상의「역사의 밤」의 주도자 내지는 주인공이며 이『대리자』의 대리자는 다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이런 긴장과 혼돈 속에서『사제 양성이 쇄신』이라는 커다란 논제하에 ①신학교 교육의 쇄신 ②신학교와 교구 사제단 ③영신생활 지도의 문제 ④지성교육의 문제, 이러한 내용으로 사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신부들의 논설이 본지에 련전된 것은 뜻깊은 일이었고 많은 독자들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을 모았으리라고 믿어진다. 사제의 직분이 아무리 존귀하다 하더라도 사제는 천사처럼 하늘에서 날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꼭같은 인간을 교육을 통해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문제가 인간과 교육에 관계되는 한 그것이 일반 세속의 경우와 원리적으로 다를 수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신학 전문가 아닌 일반 통속적인 견해도 몇 마디 표시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그 논설을 읽고 느껴지는 것은 전반적으로 쇄신이라고 볼 만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지나친 기대를 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교 교과서 식의 진부한 논설이었고 새로운 시야를 전개시키는 타오르는 정열과 리념이 결핍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다. 다음은 논설들이 모두가 현실을 떠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대지에 깊숙히 뿌리를 뻗고 창공을 향해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울창한 삼림의 이미지보다는 분재의 가냘프고 창백한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복잡다단하게 펼쳐 놓은 원리들은 대자연의 기상도이기보다는 자그마한 온실의 온도 조절 기술 같은 것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룬 흔적이 보이는 지성교육에 대한 견해다. 물론 여기서 학문적인 전문적 견해의 차이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극히 일반적인 양식에 속하는 상식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우선 지성교육을 역설하면서 지성은 광의로 생각할 때 가장 인간적인 인간 본성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건전한 약식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성이라면 근대 초기 이래로 불구가 된 합리주의적 지성만을 생각하는 학계의 상식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될 때 가장 지성적인 사제는 가장 인간적인 사제란 것을 듣게 될 것이다. 지성교육은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이 아니고 가장 광의의 인간적인 교육이다.
유명한 한스 큉이 최근의 저작「무관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에서도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신학의 협량과 애로를 지양하고 평신자의 생활 감정에 맞는 신학의 해석을 제의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광의의 지성 건전한 지성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며 이 조류가 제2차「바티깐」공의회를 움직인「선교적 신학」(게륙마 신학)의 방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우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재보인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것이다. 현대 철학의 조류라고 하는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이해 불족의 책임을 스콜라 철학에 다 돌리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물론 여기서 스콜라 철학의 가치를 옹호한다고 해서 이제 새삼스럽게 그 고궁을 정부 청사로 오늘날 사용하자는 주장이라고 이해한대서야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새로 현대식 고층 건물을 세웠으니 경복궁은 일류의 가치도 없으니 헐어 버리자는 주장도 그다지 현명하다고는 볼 수 없지 않는가?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수한 사제를 양성하려면 올바른 사제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고 올바른 사제상은 올바른 그리스도상에 있고 올바른 그리스도상은 올바른 인간상에, 올바른 인간상은 올바른 우주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니 이 올바른 길을 밝히는 자연적 광명은 건전한 지성 외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므로「사제 양성의 쇄신」안은 또다시 근본적인 쇄신이 전망된다고 본다.
끝으로 한 가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사제의 참으로 핵심문제는 여기에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사제 양성의 사활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제생활이란 결국은 사명감과 은총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학교는 이 불덩어리가 끝까지 완전하도록 도와 주는 곳이며 이 성소의 보금자리는 각가정일 것이니 가정의 성화없이 사제 교육의 쇄신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가정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제 양성의 문제는 전 민족적인 문제이며 우리 현실이 절실히 바라는 사제상이 어떠한 것인가에 우선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신학자보다도 철학자보다도 우리는 성자 사제, 무명용사 사제를 갈망한다. 바퀴가 달린 거대한 십자가를 메고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는 미국의 어느 인사처럼 여행적인 사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 참으로 가난한 정신과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옆을 지나가는「그리스도의 대리자」의 히로즘이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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