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달은 유난히도 밝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그림자가 창에 어른거리면 슬퍼할 일도 없건만 한숨이 나온다.
가을이 왔구나.
게다가 귀뚜라미가 목메어 울고 하늘 즈음에 기러기 소리마저 곁들이면 까닭 모를 눈물조차 흐른다.
『그이는 지금 어디서 저 달을 보고 있을까…』
오랜동안 소식 없는 옛정이 새삼 되살아나는 것도 달 밝은 가을 밤에나 있는 일이다.
봄이 정다운 사람과 짝을 지어 흥그럽게 웃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만날 사람을 못 만나 애태운 계절인 성싶다.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언제인가는 만나리라는 기대는 있지만 영원히 못 만날 사람을 그리워 못 잊는 쓰라림은 가을철이 가장 심하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철은 지내는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생각을 가다듬고 잘못을 뉘우치는 계절이기도 하다.
뜰에 피던 매화나무도 분에 옮겨서 방에다 두어야 하고 매화 병풍으로 외풍을 막아 주며 정성껏 가꾸면 정월달쯤 해서는 맑은 향기를 피우며 꽃이 핀다.
온실에서 피우는 꽃보다는 청초하고 아담해서 대견스럽다.
문갑 위에는 당 사기 대접에 맵시 예쁜 바둑돌을 모아 놓고 그 위에 수선화를 얹어 놓으면 뿌리가 서리고 잎이 피어나 매화꽃보다는 서민적인 흰 꽃이 핀다.
이래서 가을철 잡아들면 심심치 않다. 유자, 모과, 석류를 맵시 좋은 둥근 목판에 색깔을 맞추어 담아 놓으면 그 향기로움 또한 그윽하다. 인제는 문화주택 바람에 이런 멋은 거의 사라져 가지만 이왕 돈을 들여 집을 짓거든 주인의 서재 하나쯤 우리나라 식으로 꾸며서 우리가 아니면 그 멋을 모를 가을 치레도 한 번 해 볼만 하다.
엔간한 문화저택이면「홈빠」가 호화롭지만 가을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선인들이 즐겨서 마사던 차(茶)를 다리는 것도 주인의 품위를 위하여 보탬이 될 성싶다.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선인들이 마시던 차(茶)도 가지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손쉽게 맛있고 멋진 차를 달이는 것도 가을철에 한 번 해 볼 만한 일일 것 같다.
복잡한 재료는 구하기가 귀찮거든 한약방이나 시장에 가서 손쉽게 살 수 있는 재료라도 좋다.
모과 말린 것(한약방) 진피(한약방 또는 귤 껍데기를 집에서 말려서 쓰면 더욱 좋다) 생강(시장에서) 대추 말린 것(시장에서) 황밤(시장에서 사는데 단단하게 마른 밤일수록 좋다)
이 여러 가지를 큰 주전자에 적당히 넣고 마냥 끓이면 된다. 이런 때 꿀이나 설탕은 아예 쓰지 말고 단맛은 대추 황밤으로 대면 좋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을 외면하고 무엇이든지 외국 것을 숭상하는 일이 너무 흔해서 안타깝다.
이번 가을부터라도 우리만이 누려오던 가을살이를 더러는 되찾으면ㅡ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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