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명의 사자(死者)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생자(生者)때부터 이미 발언을 포기하고 있었다. 이 점에선 28명의 중경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고버스는 별다른 저항없이 1m앞도 비추지 못하는 헤드라이트로 사도(四圖)가 캄캄한 밤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차내(車內)의 언론이 여전히 침묵하는 가운데, 이 버스는 가로등도 없는 다리위를 난폭하게 달리다가 끝내 참사를 빚고 말았다.
▲버스가 다리 아래로 곤두박질하며 떨어져 중상을 입은 후에야 언론을 회복한 승객에 의하면 사고버스는 청계천 2가에서 이미 정비불량으로 헤드라이트가 고장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차의 꽁무니를 바짝 뒤쫓아야했고 앞이 안보이는 광진교에 이르러서도 속도를 별로 줄이지 않는 곡예를 벌였다고 한다. 그때 승객들의 반응은 『불안해 했다』는 것이다. ▲그저 『불안해 했다』는 것은 강력한 항의발언이 없었다는 뜻이 아닌가. 운전사를 과신한 나머지 모든 운명을 운전사의 尊決사항으로 들려버린 탓일까 승객들이 사고의 요인인 정비불량을 지적, 신랄하게 비판했거나 난폭한 과속에 제동을 걸었던들 참사를 막을수 있었을 것이다. 차중의 언론이 거세게 일었다면 이미 이성을 잃어 분별없는 운전사라도 승객들에게 같은 노선의 다른 차를 이용케하는 편의를 제공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사고의 책임이 불의에 희생된 승객들에게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고에 대한 전적 책임이 운전사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이러한 엄청난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승객들은 정비불량한 운정사를 고발하고 사고가 예측되면 다른 차를 바꿔탈수 있는 권한을 포기해서는 안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 같은 권한과 발언의 포기는 생명의 포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긴 비단 광진교의 사고버스 뿐이 아니다. 길거리의 모든 버스들이 정비불량 교통법규 무시 서비스 부재 등 불건강한 요소들을 조금씩 지니고 있지만 승객들로부터 고발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운전사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규격품」처럼 말이 없는 것이다. 고발해봐야 시정은 기대하기 어렵고 도리어 손해볼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 빗나간 개인주의와 이미 처세술이 된 「침묵」의 영향도 있을것이다. 어쨌든, 발언의 포기가 돌이킬수 없는 화근이 되지않길 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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