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다시 말해 다양적이다. 꽃을 사랑한다. 돈을 사랑한다. 자녀ㆍ고향ㆍ조국 등등, 사랑하는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논리적 견지에서의 애정의 성질에는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타산없는 사랑, 또 하나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또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 애향심 애국심 그밖에 측은지심 무연의 자비 등은 바로 이 사랑의 범주에 속한다.
이 사랑은 순간적이 아니다. 누가 시켜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솟아나는 인간의 지정이다.
인간의 지정- 그것은 시대의 신구가 없다. 또 국경이 없다. 저멀리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미담가화가 곧 우리에게도 흐뭇한 느낌을 주는 소이는 이러한데 있다.
가톨릭이 인류사회와 함께 연연히 유지되고 있는 것도 그것이 인간의 지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인간지정의 발로, 이것은 이방인의 것이든 우리 주변의 것이든 똑같이 감동을 준다. 만약에 이 지정의 발로가 없다면 인간의 생은 얼마나 삭막한 것일까. 인간의 살맛은 바로 이 지정이 넘쳐흐르는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데 있다. 따라서 인간지정의 발로는 바람직한 것이며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정의 발로가 행동과 유리될 때가 많다. 관념상으로는 시비선악을 뚜렷하게 가려내지만 실제로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마음속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인간의 지정(至情)이 그토록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배타적 이기적인 것의 추구라든가 관능의 쾌락 같은 것에 더 쏠리기 쉽다. 이를 가리켜 가치관의 혼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이것이 인간의 약점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뜻은 언제나 높아야 할 듯하다. 제가치관이 병존, 경쟁한다 하더라도 표준적인 가치관은 견지해야 할 것이다. 잡다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 표준에서 이탈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간지정의 발로가 수액처럼 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점 타산 없이 헌신적인 사람, 정직하고 순결한 사람, 봉사하는 사람같이 한없이 우러러 뵈는 것은 없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복된 생활을 할 자격이 있고, 그렇게 되도록 축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축원 받는 사람이 축원 받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잘사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럴 때 천주님의 현실적인 공평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까. 그러나 축원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지정(至情)이 아닐까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