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의 기념식이 끝났을 때는 이상기후 탓인지 꽤 무더운 날씨였다. 소복(素服)을 한 유족들이 수십만평 동작동 묘원을 뒤덮은 것을 보고 발길을 묘역으로 돌렸다. 23년 전 한 여름날 고종 성환형은 스물 한살의 나이로 군에 자원입대케 되었다면서 우리집에 인사하러 왔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자리서 광목천을 잘라 수건을 몇 장 만들어주시면서 몸건강하라고 당부하셨다. 형은 출전(出戰) 월여(月餘)만에 낙동강 전선에서 순사(殉死)하고 이 아들의 죽음을 23년째 통곡하는 모정(母情), 고모님은 어느새 고희에 접어든 옛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형의 비석앞에 서서 묵념하고 그 혼을 위해 기구하면서 저만치 고모님이 걸어오시는 것을 반겼다.
규격화된 비석들의 질서정연한 배열이 시각에 꽉찰 정도로 늘어선 것을 보고 이 많은 영령들의 죽음앞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살고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이 기념식날 감사해야 할것이다. 소복의 행렬 중에는 촌로(村老)의 부부가 있는가 하면 월남묘역에서는 국민학교학생 유족들이 줄지어 선 것을 보고 또 한번 가슴 한구석이 찡해오는 것을 어쩌겠는가. 막내 아우 찬주가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에 가던날 청량리역두에서 차창을 통해 손짓으로 떠나보내면서 이제 저 녀석이 죽어올수도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하고 아찔했던 일, 그러나 끝내 어머님은 웃는 낯으로 보냈고 전지(戰地)에서 한국 장병들이 사상했다는 보도가 있을 때마다 가슴 조이던 부모님과 형제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감격을 되새겨보고 이 월남묘역에 잠든 장병들의 영령과 그 유족들의 호곡앞에 옷깃을 여며본다.
6ㆍ25발발 다음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육군병원이 되고 장기방학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서 급우들과 운동장으로 스며 들어가서 상이군인아저씨들과 친숙해지던 일.
어떤날 어느 왼발이 절단된 장교에게 참혹한 모습을 위로한다는 생각에서 『왜 아저씨는 남들처럼 군에 가지말고 빠지지 그랬어요?』하고 말한순간 그 장교의 안색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어린마음에도 『아차!』하던 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주위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군복무 의무를 면탈하려는 일들은 우리를 우울케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실수는 아직 뇌리에 꽉 박혀있고 나로 하여금 40개월의 군복무를 가능케 한 동인(動因)이 된것이다. 6ㆍ25가 펼쳐놓은 민족적 비극 앞에,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군복무를 기피하고 도피성 해외습학을 갔던 사람들. 오히려 남들은 군복무를 하는 기간에 그런 사람을 무슨 바보처럼 여기면서 관직에 앉거나, 돈벌이에 손을 대어서 세속적인 출세서열에서 이겨가는 사람들. 이런 무엇인가 어긋나는 일들을 생각하고 이 넓은 묘원을 다시훑어본다. 여러말할것 없이, 6ㆍ25사변의 의미가 다양하게 평가되고 한국의 월남참전이 가령 비판받는 요소가 있다 치더라도, 이 많은 희생자들과 이 희생자들과 같은 전진속에 생사를 걸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 강토는 지켜졌고 국가적 이익은 추구되고 보호되어 오고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자기이익의 추구를 위한 충동에 있다고 하지만, 설사 그 반설(反說)이 옳다 하더라도 이 묘역에 잠든 영령들의 행동과 이들의 희생위에 간사하게 살아남은자들과의 행동에는 준별되어야 할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현충문(顯忠門)의 묘비비명앞에 섰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돌아서 나와 현충일 기념식을 알리는 신문기사는 월남묘역에서 아들의 죽음 앞에 호곡하다 실신 사망한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강한 전류가 내 전신을 뒤흔든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영령이여, 그리고 모정(母情)이여 길이길이 평안하시라.
지금까지 김태관 신부님과 정만교씨가 수고해주셨습니다. 이번호부터는 국회의원 박찬종씨가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편집자 註>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