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긴 밤을 밤새껏 문풍지가 운다. 먼 어느 빈 들을 거쳐온 그 싸늘한 바람은 땅 위를 아직도 지향 없이 서성거리는 낙엽을 계곡으로 혹은 도시의 후미진 응달로 휘몰아 붙일 것이다. 이제 농부는 추수를 마치고 곳간에 무거운 자물쇠를 달 것이며 주부들도 이제부터는 집안의 어디에는 항상 빨갛게 따뜻이 불을 마련할 때이다. 위령성월. 11월은 이렇게 하여 산도 들도 주변을 청산하며 일변 준비하는 달이기도 하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요』이것은 비단 고독한 시인 릴케만의 염원일까! 마지막 날에 와서 또 이틀을 더 아쉬워하는 생에의 미련은 오히려 다함 없는 인간의 공통된 기원이며 어쩔 수 없는 인간 조건이 아닐까?▲그러나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한계와 스스로의 연민에 대해 굳이 거부하고 낯을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연 영웅처럼 피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눈물 없이 죽는 의지의 인간만이 위대할 것인가. 소크라테스처럼 웃고 죽는 자만이 현자일까? 차라리 이러한 인간의 아픈 취약은 신에의 끊임 없는 기원의 샘이 아닐까. ▲뿐 아니라「위대한 여름」에의 아쉬움과 추억이 없었던들 우리에겐 아직도 남은 춥고 긴 겨울을 견딜 자신이 없고 마지막날 고통 가운데도 정온을 깃들이게 할 꿈과 사랑이 없을 것이다. ▲백납 같이 창백한 긴긴 여름날 책상 위에 펼쳐진 뚜꺼운 책장 쓸데없이 자꾸만 울리는 전화기, 먼지 낀 프라타나스 잎들. 이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굴러간 의식 없는 무수한 소음들. 그리고 저무는 도시의 잿빛 포도를 쓸쓸히 돌아가던 귀로. 이모든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나 또한 일말의 향수를 갖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듯』이 우리들의 지난날 또한 중요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우리에게 위대한 여름이 있어 그것을 빠짐 없이 성실히 다 수확하는 가을과 겨울이 있는 한『우리가 사랑한 것 고뇌한 것 슬퍼한 것 아무 것도 헛된 것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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