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근화여고 교장으로 있는 박 엘리자벳은 내 여학교 동창이다. 40여년 전 그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화사한 아름다운 문학소녀였다. 내 기억의 착오인지는 모르나 당시에는「멋」을 겸하여 쓰는 안경을 우리 반에서 제일 먼저 쓴 사람도 엘리자벳이었던 것 같다.
그 엘리자벳이 천주께 헌신하는 수녀가 되었다. 나는 결혼을 했고 많은 아이를 낳았고 이 세상의 모든 비애와 고통을 경험한 후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천주의 앞에 돌아왔다.
엘리자벳과 나는 오래 만나지 못했으나 그는 때때로 내게 편지를 보낸다.
깨끗한 편지지에 예쁜 글씨로 꼬박꼬박 박아 쓴 글은 때묻지 않았던 소녀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청순한 것이었다.
거기 대한 내 회답은 원고지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매우 조잡한 것이다.
『엘리자벳, 우리는 암만 해도 바꿔 된 것만 같아. 네가 소설가가 되고 내가 수녀가 됐어야 했는데 바꿔 됐단 말이야. 나를 위해 기영해 다오. 내게 행복을 빌어 달라는 것이 아니야. 이 세상의 괴롭고 슬픔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천주께 빌어 달라는 거야』
하고 나는 편지에 쓴다.
내 책을 비교적 많이 출판해 준 출판업자가 집에 왔다가 책상 위에 얹혀 있는 엘리자벳의 편지 겉봉을 보았다.
『참 잘 쓴 글씬데요? 외국 부인입니까』
『아녜요. 수녀로 있는 내 친구예요』
그 말을 듣자 출판업자는 반색을 했다.
두 사람의 편지를 모아 출간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상혼에 놀랐으나 그는 수녀와 작가의 교류가 많은 소녀들에게 감명을 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거절했지만 우리들의 편지가 공개된다면 어떨까를 생각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엘리자벨은 신을 위한 꿋꿋한 용사, 그리고 전사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흔들리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공통된 한 가지 신념은 있다.
신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자명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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