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문화와 언어는 그 발전 과정에서 양자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외부로 표현이되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언어의 역할에 의해 인간의 사유가 순화되고 의식 구조에 중대한 변질을 가져오는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동양과는 이질적인 서양의 토양 위에서 자라온 기독교가 어떻게 하면 이 땅 위에 뿌리를 내리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교회의 자기 표현 방법은 가장 원초적이며 기초가 되는 문제에 속한다. 가톨릭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이백 년이란 세월이 되어 간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기 표현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아직도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것 같다. 일반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성직계에서도 별로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이 땅에 있어서의 언어적인 유희를 극복하지 못했는가를 말해 보겠다. 몇 년 전 겨울에 강원도의 어느 첩첩산골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곳 H촌에는 유일한 식자로 통하는 유 노인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 유 노인은 아직도 상투를 틀어 올리고 밤이면 마을 초동들을 모아 놓고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날 노인과 爐邊笑談을 하다가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천주교란 말을 꺼내자 이 촌노로부터 어이없는 질문을 받고 말았다.『자네가 말하는 천주교란 수운 선생의 천도교와 비슷한 교가 아닌가?』무엇을 한 대 얻어 맞은 것 모양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다시『그러면 기독교는 무슨 교인지 아십니까?』하고 되물었다.
『그야 예수를 믿는 게 기독교지』하고 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 노인이 연상하고 대답한 기독교란 어디까지나 프로테스탄트를 지칭한 것이지 천주교는 그에게 있어서 천도교의「한울님」으로밖에 연상되지 않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H마을에 예배당이 있거나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도 그곳은 현대의 문명하고는 소원하기만 한 곳이다. 왜그러면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란 이름은 프로테스탄트의 전매특허와 같은 대명사가 되었으며 사회 일반 대중에게는 기독교라고 하면 프로테스탄트만을 연상하게끔 언어적인 유희의 변질을 가져왔는가? 요사이 나오고 있는 우리 교회의 각종 간행물들을 한 번 유심히 보라! 신ㆍ구교 간에 무슨 협의ㆍ합동행사 같은 것이 있으면 가톨릭 대표 xxx 기독교 대표 xxx식의 방법으로 실려 나온다. 교회 선구의 첨단에 서가지고 항상 사회와 교회에 대해서 계도의 역할을 해야 할 공적인 미디어 기관의 의식수준부터가 이 정도라면 우리는 다함께 무엇인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재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사이는 또 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이웃집 드나들 듯이 갔다오고 있다. 그 중에 이름 깨나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외국 여행 한 기행문쯤은 쓰게 마련이다. 그 기행문을 보면 탐방한 명승지 가운데서 구라파의 유명한 성당 이름들이 여기저기 나온다. 그런데 그 기행문에서 성당을 표기하기를 성 베드로 대사원이니 노트르담 대사원이니 하면서 불교의 절간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이러한 류의 인사들 대부분이 아니 어느 누구라도 서울의 명동대성당을 명동대사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데 이 나라의 식자 층에서는 외국 관광을 하고서 기행문 따위를 써 낼 때엔 엄연히 기독교의 경신소를 불교의 절간 이름으로 대치해 놓아야만 의미가 통할 수 있게끔 되었으니 교회는 적어도 어떤 문제점들을 이러한 경우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두 가지 사실들은 별로 우리들의 문제의식으로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소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현 세기에 처한 한국 교회가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진로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상징적인 교훈들이 이 두 가지 사실에 전부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종교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우리 교회의 역사만을 들먹이지 말고 과연 명실상부하게 역사에서 치루어온 희생의 대가가만큼 그 결실이 현세대에 와서 맺어졌느냐 할 때 여기에 대해 자신 있는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결론적인 말을 먼저 한다면 가톨릭의 한국 선교는 초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학리적인 바탕과 이론적인 원칙의 제시가 없는 데서 시종일관한 것이 모든 문제점의 遺因인 동시에 近因이기도 한 것이다. 요사이 와서 갑자기 기도문과 축일표의 용어를「천주경」에서「주의 기도」로 바꾸고「첨례」를「축일」로 고친다고 해서 용어의 토착화가 되거나 혹은 교회의 토착화가 급속히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학리적인 기초 위에서 한국 선교가 이루어지고 행동되어 왔다면 기도서 용어의 변경 따위는 몇십 년 전에 벌써 있었을 게 아닌가? 현대 사회의 특징은 너무나 조직적이고 다원적인 요소로 분화되어 모든 것을 성취해 나가자면 십 년 앞을 내다보고 미리부터 계획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 있다. 국가 행정부가 일시에 특수 상황이 돌발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슨 특별위원회를 소집해서 해결하는 식의 방법으로 만사를 해결하려 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시대를 역행하는 소치라 하겠다. 교회의 모든 용어 문제에 관한 것을 다시 생각할 때 교회 내에서만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교회 밖의 대중사회 속에까지 흘러들어가 누구에게나 우리 교회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놓을 수 있는 용어의 토착화가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하겠다.
즉 이 용어의 토착화는 종래의 기도서에 나오는 용어의 단순한 개역작에서가 아니라 보다 차원을 달리해서 신앙의 토착화라는 선교학적인 의미를 둔 용어의 순화와 보편성의 확립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며 이 용어의 순화운동이 성치될 때 일반 대중 속에서 기독교가 프로테스탄트만을 의미하는 대명사라든가 천주교가 천도교 류로 오인되는 촌노의「넌센스」같은 것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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