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사고방식과 사회생활을 지배하던 때에는 비록 인간의 권리 중에 많은 것들이 짓밟히기는 했어도 인간의 기본 권리인 생명에 대한 권리 박탈을 합법화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였으며 인간 이성이 최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 와서는 무신론이 실제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합법적으로 짓밟게 된 것이다. 산아제한이니 안락사니 낙태니 하는 것이 모두 생명에 대한 침범이며 아무리 목적이 고상하고 우주의 운명을 구실로 삼는다 하더라도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는 것이다.
생명을 헌 걸레처럼 취급할 때 그 외의 인간 권리란 보장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힘보다 정치 권세가 더 지배하는 오늘에 와서 인간의 기본 권리 보장이 점점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라면 이것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상 만민이 망각하지 않도록 선포된 것이「인권선언」인 것이다. 오는 12월 10일은 또 다시 맞이하는 인권의 날이다. 이 날을 맞이해서 무엇보다도 생명의 귀중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할 것이고 생명의 귀중성을 무시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가치관이 뒤집어진 생지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인간 생명을 너무나 헐값으로 취급한다.
잇달아 일어나는 교통사고의 원인은 차량정비 부족이 가장 많다. 귀중한 생명을 운반하는 차량을 어떻게 위험한 상태로 굴릴 수 있는지-그것도 제 생명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명을 싣고서-만일 50만 원짜리 피아노를 운반하려면 다치지 않고 잘 운반하도록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이 50만 원 가치도 못 된단 말인가?
생명을 무시하는 예는 너무나도 흔하다. 그 중에도 특기해야 할 것은 며칠 전에 보도된「태아의 장기 수출」사건이다. 몇몇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이나 의사들은 이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합리화하고 있다. 즉 모체에서 분리된 8개월이 지나지 아니한 태아는 살 가망이 전혀 없으며 시체 해부가 의학에 공헌이 컸던 만큼 살 수 없는 태아를 이용해서 의학을 발전시켜 인류에 더 큰 공헌을 하는 것은 선행으로 본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태아가 외화 획득의 기회가 된다고 볼 때 일거양득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자기의 몸을 의학 실험을 위해서 죽기 전에 연구소에 제공할 수도 있고 유가족이 시체를 실험을 위해 양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후에 생기는 일이지 생명을 끊는 행위는 아무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태아의 장기 수출」의 추태는 낙태를 허용하는 사회 풍조의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영국에서도「태아 매매」사건이 일어나 영국 국회에서까지 말썽이 생긴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태아의 장기 수출」을 합리화한다면 그 원인인 낙태 행위도 합리화해야 할 것이고 태아의 살생이 비인도적이라면 낙태도 비인도적이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낙태가 생명에 대한 침범이면 태아에 메스를 가하는 것 역시 생명의 침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자를 침범하는 행위를 비겁하고 비인도적이라고 한다. 그러면 태아는 누가 보호해 주며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
그리고 태아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하고 언제부터 인간으로 취급될 수 있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낙태행위는 인간 정신에 큰 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정신풍조가 여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체내에 있든 모체외에 있든 태아를 맘대로 취급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 순간에는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자신의 불행을 불러오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이다. 70년도의 인조의 날을 맞아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지만 실상 인조이란 선포함으로써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의 뒷받침 없이는 인조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톨릭은 실상 정신문제에 있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일시적인 안목으로 비인도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원대한 안목으로 바로잡으며 생명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 인도적인 것은 끝내 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을 사랑할 때는 생명을 주지만 자기를 사랑할 때는 생명을 빼앗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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