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성당이 많이 세워지고 있다. 그중에 어떤 것을 비평하는 전문가의 말을 듣는다.
건축, 미술을 모르는 소견에도 과연 어색한 것을 느낀다. 마당에나 성당 안에 뫼신 동고상 또한 마찬가지다. 한편 모처럼 훌륭한 성당에 제대, 십자고상, 상본, 성상 같은 것이 『잘 어울리느냐?』가 또한 문제일 것 같다. 동고상과 그의 기단(基壇)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자와 외투에는 양복이 어울릴 것이고 갓과 두루마기엔 우리 바지저고리가 어울릴 것이다. 이러고 보니 우리네 「아마츄어」따위는 서뿔리 다룰 것이 못될 상 싶다. 꼬불꼬불, 뾰죽뾰죽한 것만이 능사가 아닐진대 겸손되이 그 방면 권위에게 물어서 한다면 이런 부끄러운 것을 적어도 몇십년간 남겨놓게 되지는 않을것을…
교회서적 맨 뒷장에 IMPRIMATURE이란 글자가 찍혀져 있는 것을 본다. 서적 아닌 이런 부문에도 이것을 적용시킬 방도는 없을는지?
다음 장궤틀이 그립나. 꽁꽁 얼은 마루바닥에 꿀어앉으니 다리가 제리다. 왼장틀고 풀석 주저앉자니 성체를 뫼신 앞이라 마음이 불안하다.
모처럼 줄세워 대려입은 양복바지 무릅이 불녹해지는 것도 한가지 쪼꼬만 분심꺼리가 아닐 수 없다. 무더위에 통풍이 안되는 성당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입김과 발고린내를 맡게되면 위생명(衛生面)도 고려해야 되겠다는 분심 또한 없지않다.
신발장은 만원이고 흙묻은 신발을 이루싸갖고 들거가는 것도 주체스러워서 그대로 헛어놨다가 나올때의 이러나는 그 혼잡, 또한 보기 좋은 꼴은 못된다.
십사처 상본에다 그 헌금(獻金) 한분의 이름자를 써붙여 놔야만 열성을 북돋아주고 공로를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된다면 피차가 다시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성가를 아름답지 못하게 부른다면 이또한 분심꺼리중 적은 것이 아니다. 소양과 열성을 갖인 노력이 요망된다. 참례한느 모든 교우의 『마음을 위로 향하게』해줄 수 있는 능력과 본분이 성가대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마껴저있다는 것을 그들은 철저히 자각(自覺) 자부(自負) 해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
경문 읽는 것이 또한 그 본당에 따라서 가지각색이다. 공과의 경문은 『노래가락』이 아니며 『고담소설』도 아니며 『성명서』도 물론 아니다.
성가나 경문을 가장 올바르게 걸구하게 지도하고 통일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노주교께서 제7차 국제예절과 전교회의에 참석하시고 도라오셨다. 위에 말한 몇가지가 다 예전(禮典)과 관련성을 갖고 있을 것 같이 생각돼서 주제넘게 몇마디 고언을 하는 바이다.
최상선(성가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