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초초의 철학자 <타알레스>는 별을 관찰하며 밤길을 걸어가다 우물에 빠녔다 한다.
▲그런데 동방의 삼왕(三王) (혹은 三博士)은 새로 나타난 이상스런 별을 딸아서 찾아간 결과 마침내 「베들레헴」 성밖의 동굴속에 탄생하신 예수 아기를 조배하고 돌아갔다. 찾아가는 도중에 흉악한 <헤로데>왕의 간계(奸計)에 걸렸으나 그것을 현명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사고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전자는 과학자(科學者)였고 후자는 종교가(宗敎家)였다. 과학자의 별과 종교가의 별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종교는 모순된다거나 어느 한 쪽만이 진리(眞理)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가 과학을 탄압했느니 과학이 종교의 허위(虛僞)를 폭로했느니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삼왕들이 본 별은 신앙의 별이었다. 자연계(自然界) 중에서 별은 무엇보다도 영원을 상징하기에 좋은 것이다. 신앙은 별과 같은 것이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 우리들에게 별은 아득한 방향을 지시하며 영원을 속삭인다.
▲그릇된 교육과 불건전(不健全)한 사조(思潮)에 완전히 맹신(盲信)하지 않는 지각(知覺)이라면 이 영원의 속삭임 앞에 엄숙한 순간을 가질 것이다. 자아(自我)를 잊고 창조주의 영광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주는 별과 같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을 바리는 것은 아니다. 것은 <헤로데>같이 극악무도 지상(地上)에 집착하는 간들의 머리를 위로 들어올리게하는 동시에 극악무도 인간의 현실을 갖고있는 과학자들에게 그 한계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 신_자는 영원과 시간 사이에 중용(中庸)을 걸어간다. 인간은 영원과 시간이 교차(交叉)하는 유일한 장소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영원한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는 별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창조적인 노력 없이는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때로 우리는 『영원한 진리』위에서 안심하고 잠자는 신앙태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원이 시간속에 잠든다는 일이 없는 것 같이 우리도 진리 속에 잠을 잘 수는 없는 일이다.
▲영원한 진리는 시간과 함께 무한히 새로워질 진리인 것이다. 전통(傳統)을 존중한다는 것은 과거를 고집하는 완고(頑固)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신간 속에 산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은 삼왕과 같이 새로운 별을 볼 수 있는 순수지성(知性)과 <헤로데>의 간계(奸計)를 피할 줄 아는 현실적인 슬기와 천주성자를 조배하는 경건한 신덕(信德)이다.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