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성탄을 수일 앞두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CCDEH 소속의 평신자(平信者) 사도(使徒)들의 일단이 도착하여 그사역지인 경북 왜관(倭館) 삼청(三淸)동 『베다니아이상촌』에 들어갔다. CCDEH는 이것을 우리말로 직역(直譯)하면 『경제와 인도적 발전을 위한 협조단』이라고 하겠는데 이 단체는 그 본부를 프랑스 「파리」교회(郊外)에 두고 동본부에 병설해 있는 사회사업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단원들을 저개발국(低開發國)에 파송하여 복음(福音)의 씨를 뿌림에 앞서 우선 그 밑바침이 될 인도적(人道的) 경제적 발전을 위한 협조를 하려는 것이다. 인도적 발전은 그 기반을 가톨릭시즘에 두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거니와 특히 「사하라」사막에서 『적은자매회』의 __ __놓고 ___어사랑의 제물이 된 지사막의 은수자(隱修者) <풋고> 신부의 정신 그대로를 일상생활을 통하여 증거하는 것이며 또 한편 겨에적 발전을 위하여서는 금일의 인간생활과 불가분의 기술을 전수(傳授)함으로써 그 발전에 공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번의 이 일행도 삼청동의 주민들이 나호나자라는 점을 고려하여 간호 및 의료(醫料) 기술을 담당할 3명의 동정녀와 농경(農耕) 및 소공업(小工業) 면의 기술을 담당할 2명의 독신남자들로 편성되고 또 금춘에 1명의 의사와 1명의 기술자가 내한(來韓) 합류하므로써 총 7명의 단원이 전기 삼청동과 그 주변촌락의 나환촌의 개발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하는 점을 보아 우리는 이 협조단의 계획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 성과를 의심치 않는 바이다. 더구나 요새는 성탄을 기하여 많은 물질적 원조와 선물을 받아드림에 익숙하여진 나머지 스스로 인간의 존귀함을 잊고 참된 설물이요 진실된 원조가 바로 인간자체를 송두리채 주는 일인 것마저 잊고 있던 이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일로 표현할 수 없이 귀한 사랑의 선물인 것을 성탄절을 기하여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것처럼 그 사랑의 사업을 계승할 사도직의 실천자들이 각각 아름다운 사랑의 선물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먼나라로 찾아왔으니 어찌 환영의 환성을 올리지 않으랴.
또 이러한 활동이 순수한 평신자들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더욱더 큰 매력과 희열을 느끼는 바이다. 일찌기 우리의 조국은 평신자들의 힘으로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평신자들의 노력은 언제나 성직자의 활동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구는 일찌기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현대적인 평신도 운동의 선구가 되어왔던 옛 터전이다. 여기에 수년전에 내한한 『국제여자협조회』를 위시하여 「파리」의 『아드 루쳄』『루르드의 평신자사도회』오스트리 「뷔엔나」의 『여자전교협조회』등의 회원들이 속속 진출해 오더니 이제 이러한 평신자회 중에도 가장 특공대의 역할을 맡아볼 CCDEH의 정병(正兵)들이 내한하여 우리나라 평신자들과 손을 잡고 우리 다같이 애덕의 증거를 하자는 것이다. 입으로 진리를 부르짖기전에 진리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내 몸으로 가장 버림받고 비길데 없이 불우한 천주의 아들 딸들에게 사랑을 증거하자는 것이다. 조상(祖上)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 평신자들이 어찌 이 거사에 호응하지 않으랴.
전기(前記) 한 삼청동 나환촌은 세대수(世帶數) 불과 20여호에 80명의 환자들로 우리나라의 허다한 빈촌(貧村)과 불우한 나환자들 집단부락(集團部落)의 극히 적은 하나에 불과하다. 또 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25만 이상의 나환자가 있다고 한다. 이런 판국에서 7명의 평신자들이 내한했다고해서 또 그들이 어떠한 인도적 발전을 도모하고 기하(幾何)의 기술을 전수한다고 해서 곧 한국의 모든 농촌경제가 향상되고 이 허다한 환자들이 곧 치유(治癒)되어 단시일내에 지상의 낙원(樂園)이 이루어지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소리가 방방곡곡에서 우렁찰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요 또 이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평신자들의 활동이 이제 국제적으로 발전하여 외방전교(外邦傳敎)에 까지 진출하고 한 우리의 형제들이 애덕을 증거하는데 같이 손을 잡고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자는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일테면 이것이 하나의 정신운동이라 하겠으나 우리에게는 이 소우주적(小宇宙的)인 이러한 착한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 운동을 계끼로 우리나라에서도 형제애(兄弟愛)의 실천운동이 각 처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남에게 받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되어지기를 갈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