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무슨 일이 났어요?』
『어떤 어린이가 자동차에 쳤다는군요』
-혹시 집앞에 나가놀던 우리 애가 아닌가?
얼굴이 화끈 단다. 가슴의 그동이 방망이질을 한다. 사람 틈바구니 속을 뚫고 가마니에 덮인 어린이를 보려든다. 피를 흘리고 쓸어져있는 이 어린이가 누구일까-하고 보려는 이 사람은 이 교통사고에 『관심』을 기우린 사람이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 알고보니 뱀장수다. 살무사니 독사뱀을 모가지에 칭칭감고 있다. 이때 사람 틈바구니 속에 끼게 되는 것은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창의가 아니라 서울 명동 대성당의 주임신부인 양 신부님의 「교회일에 관심을 기우려야 된다」는 주일강론의 결론을 내기 위해 전제로 내 걸은 재미있는 비유였다.
요즈음 정치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일반시민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무관심」이란 것이 세계쩍으로 흐르는 하나의 유행처럼 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던 기계문명이 발달되고 모든 제도가 오토메이숀과하여 자기의 할 일이 세부적으로 분화되어 「제가 하는 일」외에는 관심을 기우리지 않으려 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에 대한 참여권을 최대한으로 주고 있어도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풍조가 있다고 해서 「교회에 대한 교우들의 무관심이 있을 수 있다」고 합리화시킬 도리는 없다.
성탄날밤 자시미사의중계방송을 들은 어떤 교우가 말하기를 『참 그날밤 방송을 들었는데 거참 아나운서 잘도 말하드군. 아마 교우가 아닌지 모르겠어』하고 감탄하면서 그 『아나운서』가 교우인가 아닌가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
나는 이것도 「교회 전례(典禮)를 그렇게도 잘 아는 아나운서가 누구일까?」에 불과한 이야기 같기만 했다.
우리는 그와같은 호기심에 보다는 그 다음날 저녁 「어린이 방송시간」에 『누가 누가 잘하나』에 어린이들의 노래경연에 관심을 잠시 기우렸어야 했건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래를 부를 어린이 나와주세요」아나운서의 말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백명의 어린이가 「네네」솔리 지르며 손을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 박자가 틀려 나오는 쪽쪽 낙제의 종하나가 울리군 했다.
나는 여기서 그렇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 노래를 하나도 제대로 부르지 못할 정도로 학교에서 또는 가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했나에 대해 과심을 갖고 그 실정을 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놀라웁고 관심을 기우려야 될 점은 「가톨릭성가」책에 지정된 가사로 노래부르는 어린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어린이들은 모두 열교인의 자녀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 홀로 양친은 깨여있고 귀한 금발의 천상아기-』
어떤 어린이가 가톨릭에서 지정된 이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면 혹시 심사원들이 가사가 틀린다고 낙제의 종을 쳤을른지도 모를 일이다.
가톨릭신자라 할지라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친밤. ……』이란 열교 가사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볼 일이다.
교회에 대한 관심은 실로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성당에 동고상이 생겼다 장궤틀이 놔졌다 「가톨릭 소년」이란 잡지가 새로 생겼다 「가톨릭시보」가 매주마다 나오게 됐다. -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이 남의 집 이야기처럼 무과심해서야 되겠는가?
교통사고가 나서 가마니에 덮인 어린이의 피묻은 얼굴을 「제 자식이 아닌가」하고 보는 분과 같은 「관심」이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이란 말이 교우들 입에서 요지음처럼 많이 오르내리는 때도 그물것이다. 바로 이 「평신도사도직」이야말로 「교회에 대한 무관심」을 방지하려는 하나의 「자기격려책」이 아닌가- 싶다.
신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