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젊은 평신자사도직운동의 선봉(先峰)들이 정든 고국을 떠나 수륙(水陸) 수만리의 이역(異域)인 우리나라를 찾아와 오직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헌신(獻身)하고있는 고마운 모습을 대할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은 감사하나는 점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는 심정인데 빈곤과 정신적인 면의 무식 가운데서 허덕이는 무수한 동포들을 그저 보고만 있아야 할 것인가?
오늘날처럼 우리나라에서 평신자사도직운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으며 외국 사람들보다 우리 자신들이 직접 활동해야 할 요건(要件)이 더욱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환경만을 핑계할 것이 아니라 주변(周邊)에서 실행할 수 있는 쉬운일부터 비록 적은 것이나마 한가지씩 실천해가야 하겠다는 것을 제언(提言)하고 싶다.
첫째 지식인들의 집회(集會)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과거의 허다한 교회내의 여러 행사와 집회에 있어서 지식층 인사들이 어느정도의 성의(誠意)를 보였던가 반성할 필요가 있가. 그 예로서는 어떤 강연회 같은 모임을 시일(時日)을 가장 적합한 주일날로 또는 「미사」후로 정하기도 하며 모든 방법으로 선전을 했어도 막상 회장(會場)에 나가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으니 「미사」때 그많은 젊은 남녀들은 찾을 길이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학생들만이 좌석을 메우고 있어 마치 경노회(敬老會)를 이룩한 감을 주니 모처럼 초빙한 강사(講師)의 얼굴을 대하기가 송구스러우며 더욱이 강사나 연사가 외국인일 경우에는 주최자로서 등에 땀이날 지경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지성인(知性人)들에게 적극적인 참석을 촉구하면 한결같이 다망(多忙)함과 사회적인 약속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한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과거 학생시절에는 열열한 가톨릭학생운동의 선봉장이었다는 친구들이 이제는 학창(學窓)을 떠났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기에 문화인이고 교육자이기에 우리는 그런 유치한 모임에는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고(思考)와 태도는 깨끗이 지양(止揚)하여야 하겠다. 우리는 주일미사 참례나 겨우 하는 것으로 신자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으며 평신자사도직운동의 극히 초보(初步)적인 실천과제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모임』에 참가하는 것만이라도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관심과 성의부터 갖자는 말이다. 외국인 평신자 사도직운동자들의 열열한 희생적 노력과 같은 것까지는 못따라갈 치지라면 우선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성의를 갖고 노력해보자.
鄭泰浩(大邱가톨릭靑年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