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에 어느교, 어느 교회 ㅣ근처에서 나는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 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그의 소에는 성경과 그밖에 몇권의 책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자인 모양이었다.
『교회에 나가시오?』
『네 헤헤헤헤…』
그는 어쩐지 어색한 우슴을 짓는다. 아마 신자가 된지 얼마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교한지 오래되었오?』
『아닙니다. 얼마안됩니다. 사실은 내년에 미국유학을 가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갑니다.』
학생은 여전히 어색하게 웃으며 묻지않는 말까지 덧붙여서 이야기 한다.
『미국 유학을 가는데 교회가 무슨 상관이오?』
나는 의아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신자가 되면 그곳에 가서 편리한 점이 퍽 많답니다. 그래서 다니는거지오.』
학생은 말하고 나서 멋적은듯이 손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넥타이즘이란 외국에 일어난 사조(思潮)가 아니다. 내가 지어낸 말이다. 즉 넥타이주의다. 넥타이란 우리의 의상에 군더더기이다. 그것이 없어도 곤란할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없어도 그만인 것을 치례로 목에 걸치고 다닌다. 사치품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품은 가견적(可見的)인 오직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견적(不可見的)인 우리의 사상이나 신념에 오히려 더욱 많은 것이다. 물건은 곧 눈에 뜨지마는 사상이나 신념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당자로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이다. 신앙은 깊은 목숨의회의로부터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최심(最深) 최저(最底)의 장소에 자리 잡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넥타이가 아니다.
바지나 저고리와 같이 만일 벗어버리면 우리는 겨울의 모진 추위에 얼어 죽게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과 헤어진 후 혼자서 천천히 길을 걸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물론 그 대학생의 경우는 특수하게 지나친 행동이다. 철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본질적으로 우리 사상이나 종교에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나는 나 스스로를 반성하며 등에 소름이 끼침을 느끼었다.
『나의 신앙은 과연 나의 목숨과 불가분의 결합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넥타이에 불과하지나 않을가?』
李璇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