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최초의 가톨릭의사회의(醫師會議)가 「필립핀」공화국 『가톨릭의사회의』주최로 「마닐라」시에서 성대히 개최되었었다고 전한다.
백여명의 가톨릭의사들이 이같은 국제적 모임을 가지고 단지 의학(醫學)에 공헌할 것을 일삼는 과학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당면한 몇가지 문제를 「메인 테에제」로 내걸고 진지한 「씸포지움」을 하는 한편 가톨릭의사로서의 태도를 명시(明示)하는 공동결의(共同決議)까지 하게된 데 우리는 크게 주목하는 것이다.
이같은 중요한 가톨릭국제회의가 있을 때마다 그런 장소에 나서지 못하는 우리의 안타까움은 다만 의학(醫學) 분야에 한한것은 아니로되 외신(外信)이 전하는대로 이 회의의 성질을 더듬어 보건대 우리의 현실(現實) 문제를 그대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삼(再三) 그 모임의 뜻을 높이 평가(評價)하지 않을 수 없다.
듣건데 『빡스 로마나』학생회의에 나갔던 학생대표 중에 마침 의대생(醫大生)이 있어 그것도 공개회의(公開會議)의 1부에 참석하고 간신히 「리스트」에 올려질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지극히 침체한 한국가톨릭의사들의 행동력을 새삼스리 문제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담 <가톨릭><의사>란 두 말이 상반(相反)될 수 없어야 하는 가톨릭의사의 본질과 현실에 처한 그 사명에 약간 언급해보자 하는 것이다.
「마닐라」국제가톨릭의사회의에서 가장 크게 논의되었고 사실상 전 회의시간의 90%를 소비한 것은 인구과잉(人口過剩)문제와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산아제한(産兒制限) 문제였던 것이다.
산아제한으로 인구의 팽창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늘에 비롯한 새로운 논의가 아니다. <말더스>의 『인구이론』(人口理論)에서 불붙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매력을 부리고 있는 듯하다. 이런 논의를 집어들고 장황히 논할 겨를은 없다. 이는 논의되어야할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아니라 당장 이날이라도 가톨릭 의사가 치료실에서 부닥칠 수 있는 실제문제인 것이니 그까닭은 『버어스 콘트롤』(産兒調整)의 실행수단의 대부분을 의학(醫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사로서 교회가 금지(禁止)하고 있는 유산(流産) 등의 태아(胎兒) 살해(殺害)를 비롯한 피임(避姙) 행위 및 그와 유사한 행위 그리고 안락사(安樂死)와 같은 불의(不義)에 의술(醫術)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태도만으로 만족하기에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센 악(惡)의 현실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저 산아제한의 실행층(實行層)을 두 계급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부유층(富裕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마치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처럼 「어머니(母性) 되기를 거부(拒否)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일동안 2딸라의 우유(牛乳)값이 없어 아기를 못기르는 것이 아니라 한주간 20딸라의 술값을 낭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같은 부유층의 향락을 위해서 신성한 의술은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른바 인구의 과잉(過剩)을 우려하여 산아제한의 입법처치(立法處置)를 단행하여 농촌과 세궁민층에 그 실행방법을 계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진실로 사회문제(社會問題)의 근원이 되는 것이 결코 인구의 과잉 때문이 아니며 그보다는 첫째는 사회정의(社會正義)가 뒤집어진 탓이요 둘째는 종교의 힘의 쇠퇴로 인한 애정(愛情)의 혼란(混亂)에서 오는 것이며 더욱 직접적으로는 위정자(爲政者)의 정책빈곤(政策貧困) 내지 실정(失政)에서 오게된 것이 많다. 이런 「에러」를 「캄푸라쥬」할 수단으로 인구의 과잉을 핑계삼고 아마 민중이 달콤하게 들을 긋한 산아제한계획을 획책하게 되는 것이다.
전자(前者)나 혹은 후자(後者)의 의미에 있어서 의료인(醫療人)은 그 자신의 인격적 윤리적(倫理的) 자각이 없고서는 불의(不義)에 이용당하는 가련한 위치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사의 사명(使命)은 뚜렷한 것이다. 혈실생활에 있어서도 영성(靈性)의 우위(優位)를 인정하고 또 교회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진정한 가톨릭 의료종사로서는 어떠한 난(難)조건이라도 이를 무릅쓰고 과감한 소신(所信)에서 살아야 할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이런 공동의문제를 가진 가톨릭의사들은 모름지기 일련된 모임을 가질 것과 앞서 말한 「마닐라」의 결의를 재확인(再確認)하는 전국회의를 조속히 열어야 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교회는 오직 가톨릭의사의 적극적인 사도적 활동의 협조를 얻어 비로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