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을 갓 넘긴 어느 뜨거운날의 오후. 조는듯 서있는 소나무 둘레에서 적막감마저 일으키게하는 금포 반도의 인적드문 부대 사격장. 초계병(哨戒兵)들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막 박은듯 산뜻한 희말뚝에서 10m정도의 간격을 두고 4명의 헌병이 執_자세로 서있다. 서울서 2시간. 엠블런스에 호송되어온 사형수 이모(李某)는 이제 곧 저 흰말뚝에 묶여서게 된다. 그의 재심재판에서 관선변호인을 맡았던 나는 최후의 모습을 지켜보러 집행관 H 대위의 권유로 여기까지 온것이다. 호송길 2시간의 찦차안에서 나와 H군은 별말이 없었다.
복중이련만 더위를 느낄수도 없었고 비록 사형에 처할 강도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그 최후의 순간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젊은 우리들의 가슴에 착잡한 감회를 일으킨 것이다. 드디어 말뚝에 바짝 뒷문을 들이댄 「엠불런스」의 문이 열리고 결박된채 의자에 앉은 그에게 H군은 신상조서를 일일이 확인한다. 놀라운 것은 문이 열리고 신상확인이 진행되는 동안 이제 그가 서서 묶일 말뚝과 둘러선 10여명의 관계인을 넌지시 훑어보는 그의 표정이 상상외로 태연 자약하다는 것이다. 그와 눈길이 순간 마주칠때 나는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눈길을 슬쩍 감추었으니. H군은 결박을 풀게하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느냐 가족에게 편지를 쓰겠느냐고 물었다. 냉수 한그릇을 청하고 종이와 필을 달라고 했다. 냉수 한그릇을 천천히 마신 그는 남향하여 자동차 바닥에 꿇어앉는다. 눈을 지긋이 감더니 아, 아, 성호를 긋는것이 아닌가. 그가 신자인것을 미쳐 몰랐던 나는 순간 무척 후회를 했다. 왜 신자인 것을 몰랐던가. 알았더라면 좀 더 따뜻하게 변론할수 있었을텐데. 기도를 마친그는 의자에 엎드려 부모님께 문안 글월을 쓴다. H군과 지켜 서있던 관계관들이 바로 얼마전보다 연민의 정이 더욱 역연해진다. 부모께의 글을 다 쓴 그는 아내에게 쓰기 시작한다. 그때 H군을 보좌하던 L상사는 그에게 그 아내가 갓난아들을 업고 창원군 웅동면 그의 친정으로 가던길에 도선이 전복되어 익사했음을 알려준다. 사형이 확정된후 불과 월여(月餘)전의일인데 차마 그에게 알리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받을사람이 이미 없어졌는데 편지를 쓰기때문에 알린것이다. 참담하다는 것은 이럴때를 이른것인가. 지금껏 태연하던 그가 두 손을 모아쥐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 모두 눈길을 돌릴수밖에. 얼마가 지난후 그는 다시 단정한모습으로 남향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 차에서 내린 그는 시키는대로 흰말뚝에 다가섰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진해에서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그는 어찌어찌하여 부산에서 운전사가 됐다. 택시가 흔치않던때라 수입이 일정치 않은데다 빚까지 지고 실직상태가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꼬오리니꼬프」적 선택으로 어떤 택시를 골라잡고 진해근교에 이르러 금품을 빼앗을때 완강히 반항하는 피해자가 문득 겁이나서 증거를 인멸할려는 순간적인 생각에 살해하고 만것이다. 진해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영세한 것이다. 마지막 기도는 해군본부 군법회의에 재심청구를 했으나 재심사유가 한정되어 우발적 범행으로 인정한 재판관들도 어찌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범죄심리학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평균적으로 범죄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단지 발현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밖에 없다고 본다. 그 하찮은 가난이란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죄와 벌에 괴로워하고 통곡하고 있는가. 가난을 몰아내고 영혼의 안식을 얻도록 그렇게 화평하게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인가. 이제 그의 손에 어이없이 살해된 통탄하는 피해자의 넋을 위로하고 죄값을 알고 감수한 이 베드로를 생각해본다. 12년전 하오의 정적을 깨뜨린 4발의총성. 그 육신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에 가슴 답답했던 장면이 어제런듯 선하다. 그 최후의 순간에 단정히 기도하던 이 베드로. 이제 그 기구의 의미와 깊이를 씹어본다. 영혼들이여 길이 평안하시라.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