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은 상호부조(相互扶助)하며 궁경에 빠진 이웃을 잘 도와주는 미풍(美風)이 있었다. 남에게 줄줄 아는게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갑겠다고 평생 잊지 못하여 열초보은(結草報恩)하리라고 했다. 이러한 착한 백성이 해방과 특히 저 공산당의 난을 당하여 일시에 향토와 가산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게 될 때 수많은 피난동포와 무의무탁한 고아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궁핍과 곤경을 소개받은 외국 교우들이 한국의 환란과 궁핍을 구하기에 얼마나 용감했고 그들의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내기에 얼마나 열심했던고? 십여성상(十餘星箱) 한국이 받아들인 애긍의 금품과 물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에 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뒤에 숨은 애덕을 살펴볼 겨를마저 잊고 이 애긍의 뒷바침이 실로 신앙운동으로써 표현되고 굶주린 형제들을 위하여 천주님께 귀한 희생이 바쳐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최근 외신(外信)에 의하면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婦人會)는 금년에도 3월 11일을 『한국을 위한 날』로 정하고 그날 하루 대재(大齋)를 지켜 그 굶음으로 야기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한국 형제를 특히 고통중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천주님께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1958년에 시작하여 8만불을 한국에 보내왔고 그 다음 해는 15만불을 보내 왔고 금년이 제 3년째의 운동이다. 우리는 그 금액(金額의 다과(多誇)과 희생(犧牲)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기러한 금액은 결코 어떤 특지가가 대금(大金)을 거출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 운동에 참가한 모든 오지리 교우들이 하루의 희생을 천주께 바치고 그날 가용(家用)에 절약된 소액(小額)을 모아 한국으로 보내오는 것이다. 이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은 가톨릭 부인들이 주체(主體)가 되어있지마는 실제로는 가정주부들의 주창에 전 가족이 호응하고 전국 성직자가 수도원 기숙사 등도 다 참가하는 것임으로 오지리 전국민(全國民)이 가한다고 해도 과연(過言)이 아니다.
오지리 신문(新聞) 잡지(雜誌)에는 종종 한국사정이 소개되고 또 부인들의 한국을 위한 모금(募金)운동에 협력한 미담(美談)들이 자주 소개되는데 그 중 몇가지를 들어보면 한 노파는 그의 평생소원인 <루르드> 참배를 위하여 부지런히 저축하여 3년동안 3천 「쉴링」 즉 환화(闤貨)로 약13만환을 모았다가 한국을 위하여 거출했고 또 어떤 늙은 간호원은 60 평생에 모운 전재산이 55만환이었는데 성당에서 나오는 길로 이 노간호원은 그의 전 재산을 본당 신부를 통하여 한국을 위한 애긍으로 거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격적인 이야기는 허다하여 일일이 매거할 수 없거니와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기 희생을 송두리채 바치는 그 정신인 것이다.
한편 우리 한국교우들의 경우를 생각하여 볼 때 받는데만 익숙하여 어언간 주는 것을 잊은 감이 없지않다. 원조를 받는다는 말을 쓰기에 마치 일상용어처럼 버릇이 되었다.
성당을 신축한다 무슨 교회사업을 한다고 할 때 교우들은 처음부터 외국원조를 운운하고 이 일은 신부 혼자 할 일처럼 생각한다. 심지어는 외원(外援)을 잘 얻어 성당을 신축하고 교우들은 편리하게 해주는 신부를 훌륭한 신부로 칭찬하고 교우들의 자력(自力)으로 할 것을 권하는 신부를 무능한 신부로 멸시하는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교무금(敎務金)의 증수성적을 들어보면 실로 부끄러운 사례가 허다하다. 교우의 본분마저 남의 힘에 의존(依存)할 생각인 것 같지 않은가 싶다. 어찌하여 한국교우들의 일부나마 이처럼 받는 선수가 되어 우리의 형제들이 생활고로 수계(守誡)마저 못할 형편에 있는 현실을 방관(傍觀)하고 남의 희생에만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어찌하여 우리는 받을 줄만 알고 줄쭐 모르는 교우로 되었단 말인가? 실로 통탄(痛歎)할 일이라 하겠다.
작주(昨週) 본지에 보도된 서울교구장 노(盧) 주교의 사순절(四旬節) 멧세지는 우리 교우 들에게 적절한 권유이며 사순절을 마지하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실천에 옳김 지침(指針)을 잡아주신데 애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바 있거니와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보속하는 뜻을 행동으로 표시하는데 더 나아가 하나인 교회안의 한 형제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의 희생을 남에게 줄쭐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하겠다. 돈이 없어도 좋다. 구리에게는 피도 있고 땀도 있다. 또 남들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바칠때 우리도 희생으로 갚을수도 있고 남들이 대재를 지킬때 우리도 하루를 굶을수 있지 않느냐. 우리는 남을 위하여 신공(神功)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요 정신의 문제다.
신앙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우리도 받는 사람에서 하루빨리 주는 사람이 되자고 외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