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운장>(關雲長)이 사로잡힘이 되어 「오」(吳)나라 조정에 헌신되었을 때 <손권>(孫權)은 갖은 말을 다하여 포섭(包攝)을 꾀하였다. 그러나 <운장>이 종내 굽힐 기색이 보이지 않음으로 끝에 가서는 그 아들 <개평>(開平)에게 <손> 왕의 딸을 내어주겠노라 하여 사돈 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랬지마는 <운장>은 이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이 개 돼지 같은 놈들아 내가 이 굴욕에도 견디기 어렵거늘 하물며 너의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가보냐.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내 목을 벰으로써 이 더러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도저히 그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정한 「오」나라 왕은 부득이 그 머리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운장>의 일생은 끝났다.
후세의 사람은 이 <운장>의 태도에 대하여 두가지 논평을 가하고 있다.
당시 「오」는 국권(國權)이 확립되어 <손권>의 위치는 왕으로서 늠늠한 바 있었으니 아들 <개평>을 「오」왕의 사위로 줌으로 해서 <운장>은 그 기품과 무용(武勇)으로써 넉넉히 『오』의 국권을 한손에 쥘 수가 있는 것이 분명한 판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터럭만한 타협없이 죽음을 고집(固執)한 것은 일개 무부(武夫)로서 『우자지소행』(憂者之所行)에 지나지 못한다. 인간 일생에 기회란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닌만큼 <운장>이 만약 지(智) 있는 인물이었다면 「오」의 국권을 잡음으로 해서 『삼국지』(三國志)에서 볼 수 있는 천하의 대세(大勢)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했고 또 하나의 논평은 <운장>이 <조조>(曺操)의 막중(幕中)에 갇혔을 때도 갖은 후대(厚待)를 받고 휴옥에 이겨나지 못할 정도로 호의(好意)는 느꼈지마는 필경 오관돌파(五關突破)로 탈출한 것은 그의 본해릐 생리가 아니였겠는가? 그러고 보면 지조(志操)를 굽혀서까지 천하를 얻은들 그것이 무슨 참다운 「귀」(貴)가 될 수 있으랴? <운장>이 <손권>의 뜻을 물리치는 고집은 다만 타협에의 피신이 아니라 적어도 숭고한 지조에 통하는 길이요, 동시에 <현덕>(玄德)에의 의리를 죽음으로써 지킨 것이다 라는 것이다.
양자(兩者)가 함께 이유 없음이 아니지마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타협이 너무나 값싸게 성립되는 반면 지조에 통하는 고집이라고는 그것이 치명적이건 아니건 얻어보기에 자못 힘이 든다.
중국(中國) 땅을 밟아보신 분은 누구나 목도하였으리라 싶지만 도처에 『관묘』(關廟)가 세워져 있다. 만약 <운장>이 그때 「오」 왕과 화(和)를 맺었드라면 일시의 존명과 영화는 있었겠지마는 영구만대(萬代)의 묘위(廟位)는 이루지 못했으리라 싶다.
李雨柏(筆者 大邱每日新聞社 副社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