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에도 우리는 수많은 새로운 학사(學士)들을 맞이한다. 기쁜 일이다. 제군들이 십유여년간 형설의 공을 닦아 이제 졸업의 영광을 얻어 신진기에한 정신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우리는 충심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군들의 전도(前途)에 풍성한 성총이 내리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군들과 같은 씩씩한 일군을 고대하고 있었다. 국가의 발전이나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진실로 일군이 부족한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한탄하고 있었다.
『사람은 흔코도 아쉬운 것이다』 『사람은 많아도 쓸만한 사람은 적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더구나 이제 재건의 도상에 있는 우리의 형편에 있어서랴. 우리는 제군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이 때에 제군들에게 대단 우리의 기대하는 바 일단을 피력하여 보고자 한다.
우리는 제군들이 진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해마다 수만의 학사들이 교문(敎門)을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더라도 말할 자신은 없다. 빛은 밝은 것이다. 항상 희망에 넘치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것이다. 어둡고 더러운 것이 없다. 뚜렷이 길이 있는 것이오 스스로 숨김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아니 하냐. 누구에게 무엇을 반항하고 있는지 알수도 없는 반항을 그러한 반항을 함으로써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는 듯이 자부하고 있는 새로운 학사들이 있지 아니 하냐. 이것을 소위 자학(自虐)이라고 한다. 아무러한 근거도 아무러한 목적도 없는 자학을 아무리 해보았댔자 거기에 무슨 결론이 나올 도리가 없는게 아니냐. 이것을 소위 실존의식(實存意識)이라고 한다. 이러한 실존의식과 허무나 무정부와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게 있느냐. 우리는 인생을 부정(否定)하기 위한 부정을 되풀이 함으로써 결론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니다. 어두울래야 어두울 수 없는 것이 빛이라는 것이다. 빛이 없는 것이 바로 어두운 것이다. 스스로 절망하는 사람은 사실은 빛이 없는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이 많고 기능이 많은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담 더 지조(志操)가 굳은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우왕(右往) 좌왕(左往)하고 있지 아니하냐. 바람이 부는대로 물결이 치는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지 아니하냐. 처세(處世)에 능난한 사람은 많아도 지조가 굳굳한 사람은 많지 못하다. 남에게 아부는 잘할지언정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정확한 판단은 하는지 몰라도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실행할 힘이 없어서보다 실행할 의사(意思)가 도무지 없다. 왜? 이해 타산이 앞서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영리한 사람은 많아도 현명한 사람은 적은 것이다. 기회 따라 변할 수 있는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나 변하지 않는 소금이 필요하다. 일관(一貫)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출세에 급급한 사람 남의 눈치만 엿보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결국 일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우리는 비록 우둔할지라도 부동(不動)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가 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의 이상이 실로 거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군들이 사회에 첫 걸음을 나서서 환멸의 비애를 느낄줄 안다. 현실이 너무나 냉담한 것을 느낄줄 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으ㅟ지가 견고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많은 학사들 보다 더묵 씩씩한 학사가 제군들 가톨릭학사라야 하지 않겠느냐. 제군들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라도 하는 일을 아무라도 하는 것 쯤이야 무슨 모범이 되겠느냐. 제군들은 투철한 가톨릭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냐.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젊은 청년이 아니냐. 남을 의뢰(依賴)하지 말라. 남을 지도를 받는 것과 남을 의회하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다. 의뢰하는 사람은 다시 남을 원망할 것이다. 그렇다. 하고싶은 열정이 충분히 있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는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