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청년노동자 조직(JOC) 한국의 지부가 발족한 것은 겨우 햇수(年數)로 3년째이다.
그해(1958년 11월 14일) KOC의 창설자이며 50여년간 오직 청년노동운동에 몸을 바쳐온 <요셉 가르다인> 준주교의 내한을 계기로 9명의 뜻있는 회원을 얻어 지극히 초라한 그러나 이 땅에서 처음보는 한국 JOC의 결성을 보게된 것이다.
한국의 노동상태(狀態)를 살피건데 이제는 무슨 요행으로 혹은 자연히 개선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낙관하기에는 해를따라 험악한 지경으로만 함입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나 심각하다. 자연히 개선된다는 생각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서는 어찌 노동상태만이 따로 개선될 수 있으냐. 그것은 다른 일반문제(특히 경제상태)와 동시에 결정된 성질의 것이 아니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및 사회상태와의 밀접한 상관성(相關性)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단지 막연하기만한 일종의 「정신적 아나키」에 비롯한 것이라면 소위 「맑스」적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선 적극적 노력과 웃지못할 대조(對照)를 장만할 것을 우려치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태(事態)에 우리는 서슴치 않고 JOC와 같은 노동운동의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 도입(導入)하여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을 줄 안다.
그 연고는 JOC의 조직과 같이 강력하지 못하고서는 청년노동자들이 벅찬 현실을 처이겨 나갈 수 없다. 그때문에 먼저 그럽을 형성하고서 공동으로 생활환경을 개선해가는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앙(信仰)의 특색은 개인적으로 파괴되지 않는데 있다고 누가 말했거니와 이같은 공동의 조직에 있어서도 역시 파괴될 수 없는 단결을 완성해야 하겠다. 「맑스」적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에 있어서도 노동운동에 이르러서는 뭣보다 먼저 단결을 강요(强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그것은 자유와 책임위에 선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의사(意思)와 노력에 바탕을 둔 단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노동운동은 정확히 휴매니즘에 입각한 것으로서 경제적 혹은 문화적 생활환경의 조건을 개선하여 그로 하여금 각자의 인격을 닦아나가자는데 있다. 노동자의 인격을 하나의 상품(商品)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나 무슨 경제계획의 미명(美名)으로 강제노동의 비인격적 제도를 세우고 있는 공산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 하등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사회교의(社會敎義)를 충실히 실천할 수 있는 JOC에 있어서 앞서 말한 한국적인 모순과 또 세계를 휘잡고 있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대조류(二大潮流)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실지로 구라파의 중요한 공업지대에서 오직 공산조직과 맞설 수 있는 가톨릭 청년노동운동으로서의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 일본 「필립핀」 「베뜨남」 등지에서도 사회적으로 뚜렷한 기반을 장만하고 있다. JOC의 창설자 <까르다인> 준주교는 한국의 공장노동자의 실태를 전문가의 눈으로서 보다 한국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겠다고 말하였다. 그 까닭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첫째 한국노동자의 불우한 생활상태는 즉각 개선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둘째 고용주들이 또한 교회의 정신을 익혀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주인(主人)이 하인(下人)에게 할 본분(本分)은 무엇이냐』(교리문답)하는 정보의 교리지식만으로서는 도저히 밖안의 거센 진행(進行)과 보조를 같이 할 수는 없다.
이미 3년전에 발족한 JOC한국지부는 아직 한개의 지방조직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 연고를 왈가왈부 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만일 다른 일반적 문제와 동시에 해결되기를 바라는 낙관론에 비롯한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정신적 무관심(冷淡)은 없다고 경고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JOC의 발전책을 진지하게 강구해야 하겠다.
노동자의 주보(主保)인 성요셉성월을 맞아 각 본당에서 그 본당소속의 청년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의 JOC조직을 구성하여 교회가 원하는 사회교의를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러기 위해서는 본당신부의 지도가 있어야 하겠으며 아울러 JOC 한국지부는 각국의 실정에서 빌린 생생한 지식을 살려 먼저 『리이더』의 양성에 전력할 것이며 그 선전에 인색하지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