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과 동시에 남으로 되물러가는 일제(日帝)의 신도정권(神道政權)의 뒤를 따라 북으로부터 눌러내린 공산정권이 38선에서 정지되었고 6·25동란으로 남침한 공산병력(兵力)이 겨우 휴전선(休戰線)까지 되몰려갔다. 그러는 동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의 교회는 해마다 지극히 평온한 『고난주일』을 맞이하였다. 오늘도 우리는 마음 놓고 고난의 전례(典禮)에 참예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북으로 달림을 걷잡을 수 없다.
밤중에 끌려가진 이래 아직 장년의 몸으로 행방불명이 되신 평양교구의 <방지거> 홍(洪龍浩) 주교. 노쇠하신 몸으로 평양감옥에서 옥사(獄死)하신 원산교구장이며 성 「베네딕트」대수도원 「압바스」인 <보니파시오 사우엘> 신(辛) 주교. 『죽음의 행진』 끝에 추위에 떨면서 피로와 영양실조로 병사하신 평양교구 첫 교구장이며 제1대 주한교황사절 <제임스 번> 방(方) 주교, 그리고 험한 행진 도중에 쓰러기조 총맞아 죽은 여러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때마침 유렆에서 「유고스라비아」의 <스테피나쓰> 추기경이 연금중에 서거하신 뒤를 이어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주 카이민> 주교가 역시 감금중에 서거하셨다는 보도는 우리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그에 보태어 「메리놀」회 총장이던 <월쉬> 주교가 중공으로부터 그의 노령 때문에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20년 징역의 중형을 받았고 <꿍 핑메이> 주교는 종신징역의 선고를 받았으며 동시에 13명의 젊은 중국인 신부들이 5년 내지 25년의 언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한편 서구에서도 「첵코스로바키아」의 <홀라드> 주교, 「유고슬라비아」의 <세카다> 주교, 그리고 「폴란드」의 <구도우스키> 신부가 체형을 받았다. 이밖에도 여러분의 신부 신학생 수도자 평신도가 형을 받았다.
「요리문답」이 명시하는 『마귀의 존재』를 등한시하고서는 도저히 그 정체(正體)를 파악할 수 없는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신의지(疫神意志)인 공산당의 반종교투쟁 전술은 때와 곳과 환경에 따라 천변만화한다. 그러나 대개는 교세의 강약에 맞추어 완급(緩急)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폴란드」에서는 <위진스키> 추기경이 아직 감금을 모면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실천적인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타리」공산당은 교황 비난(非難)을 입밖에 내기를 조심하면서 당원(黨員)의 미사참례를 허용한다. 그것도 역시 그 나라의 전체적 분위기가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베트민」(越盟)에서는 그리스도를 빈자(貧者)만의벗으로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그들의 빈자에 대한 유혹선전과 결부시켜 신자들을 우선 포섭하자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교세가 약한 국가에서는 압력을 늦출 필요가 없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일차단결된 교회를 분렬하여 고립화함으로써 교세를 약화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의 종좌(宗座)로부터 분리케 하는데 갖은 수단을 쓰다가 마침내 강압을 사양치 않는다. 그런 경우에 덮어씌우는 합법적 죄목이 각국을 통하여 꼭같이 『반국가음모』와 『간첩행위』라는 것이다.
그 뚜렷한 예가 <꿍 피메이> 주교와 <월쉬> 주교의 경우이다. 「홍콩」을 경유하여 새어나오는 중공의 소식을 듣건대 장정들이 변방(邊方)의 강제노동에 징발된 신자가정이 거의 없으며 교사한 심리(心理)전술을 응용하는 세뇌(洗腦) 훈련을 안당한 신자청년이 거의 없다고 한다. 공산당의 강압이 세다기 보다 오히려 인간본성의 연약때문에 본의(本意)아닌 굴복을 감수하는 비참한 사실도 있다. 중공의 소위 『애국적 교회』가 그것이며 그에 속하는 불법(不法) 주교가 31명에 달한다니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그러면 북한에 있는 우리교회와 교우들의 형편은 어떠할까? 그 진상을 파악할만한 소식을 얻을 길이 없으나 첫째로 상상되는 것은 목자(牧者)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당시의 교세가 4만명 미만의 약세이었고 1·4후퇴(後退)때에 남하(南下)한 수가 결코 대다수가 될 수 없을지라도 그만큼 감소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경우에 취사는 공산당의 수단을 생각할 때 북한에서는 교회를 볼 수 없을 것이 아마 거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이 북한(北韓)에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박해시대에 목자 없이도 30여년이나 계속되었고 일본에서는 3백년 가까이도 중단되지 않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무서운 모험과 더욱 가혹한 고난이 따른다. 만일 알려진 신자로서 최후까지 끈기있게 또 굳건히 신앙을 지켜나가려면 그가 당해야 할 고난은 일층 더 무자비할 것이 틀림 없다.
최근에 「리투아니아」를 거쳐서 자유세계로 새오나온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안의 수녀들의 애끓는 고난기록을 보건데 그들에게 물론 목자가 없으니 미사도 없고 성사도 없고 또 기도서도 없다. 거기다가 설독과 욕설과 무례한 대우와 주림과 추위와 피로와 고적과 단조와 향수(鄕愁)와 병고가 밤낮으로 엎치고 덮친다. 그러한 경우에 투쟁 대상은 박해자 보다도 오히려 어디까지나 연약한 자신의 인간본성일 것이다.
이에 으렴풋이나마 그러나 뜨거운 동정으로 북한의 교유들을 생각하건대 그들은 틀림없이 봄판공을 회상할 것이오 지난날의 본당신부님이 그리울 것이오 즐거운 부활이 가까움을 환기하는 고난주일의 전례를 기억할 것이다. 오랜 신자들은 계절과 기후의 변천에 따라 전례역(典禮曆)의 변화를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히 자주보를 덮어쓰신 성모님을 상기할 것이다. 우리는 해마다 전례를 통하여 오주의 고난에 참예한다.그러나 그들은 날마다 몸소 참예하고 있다. 그들을 위하여 한번 더 눈을 감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