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6·25사변) 신자수에 있어 거의 3배로 증가되고 있는 한국교회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 견지에서 대내외(對內外)적인 저항(抵抗)을 일으키고 있음을 상상키에 어렵지 않다.
그 하나는 이 땅 고유(固有)의 사회구조(社會構造)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舊型態)에 변혁(變革)을 가져오게 하되 어떻게 하면 무난히 새것을 즐겨 받아들이게 할 수 잇느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 고유(固有)의 것(民族文化)을 잃지 않고 하나도 져버리지 않고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긴요한 일이면서 또한 지극히 어려운 첫과제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후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물론(唯物論)에의 맹종이다. 유물론을 가져 무슨 새론 사조(思潮)로 보고 선진국의 기술의 진보나 물질문명(物質文明)의 유물론을 바탕으로 하는 줄 오상(誤想)하는 일이다.
이 두가지를 모두 한국적인 현실로 솔직히 시인(是認)치 않을 수 없다면 이에 답(答)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길을 곧 선택해야 하겠다. 그 가장 완전한 길은 그리스도교 신자생활인 것이다. 「그리스챤」이라함은 그리스도교 신자생활을 완전히 봉행(奉行)하는 자를 지칭(指稱)한 것이다.
완전한 신자생활은 우리는 교회의 전례(典禮)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전례의 본뜻에서의 넉넉한 인식 위에 그 값을 지득(知得)하면서 몸으로(行動) 그 한몫이 될 수 있어야 하겠다.
앞에 말한 그러한 의미(意味)로서의 한국적 위기(危機)를 구할 길은 신자생활을 완성(完成)시켜 줄 수 있는 전례를 통해야만 하고 이로써 참 신자사회(社會)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결론(結論)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 사회에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우리안에 들어서므로써 비로소 신자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신자사회를 구성하는 결정(決定)적 구실을 하는 것은 전례밖에 없는 것이다.
이같은 교회의 전례가 과연 얼마나 잘 집행(執行)되고 있으며 또 신자들이 흡족(洽足)히 지해(知解)하고 있는지 몇가지 성찰할 것이 없지 않다. 전례의 중추(中樞)는 역시 마사성제(聖祭)인 것이다.
우리는 곧잘 미사첨례(瞻禮) 또는 참례(參禮)를 한다는 말을 쓰고 있다. 첨례의 첨(瞻)은 우러러 쳐다본다 혹은 바라보면서 생각는다(瞻想)하는 정도의 뜻밖에 없다. 참례(參禮)라 할지라도 그곳에 나선다는 것을 말할뿐이다. 우리말에서 뿐 아니라 외국어에서도 그런 예(例)가 없지 않지만 몸으로 말하자면 행동으로써 전례의 일부분이 되어 그 진행과 같이 움직이고 사제(司祭)와 더불어 거의 호흡을 같이 하면서 천주께 이 가장 완전한 제사를 올려야 하는 전례 본래의 목적과는 너무나 먼거리에 있다고 하겠다.
제대(祭台) 위에서는 사제가 미사를 거행하고 있고 신자들은 그야말로 첨례를 하고 있어서는 그 효과의 반도 차지못할 것이다. 좀 큰 본당이면 2층에 성가대(聖歌隊)가 있어 전례를 돕고 있지만 제대와 성가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신자들은 잠자듯(?) 고요한 수가 있다. 그중에는 경본책도 없이 빈손으로 첨례를 계속하는 이도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를 일일히 지적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거니와 그 연고를 그대로 적시(摘示)하건대 전례에 대한 인식의 부족 내지 결함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바이다.
30년 40년의 신자생활을 영위하고서도 막상 남(외교인)으로부터 전례의 어느 한 부분을 들어 설명을 구할 때 입을 봉할 수 밖에 없다면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 당연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자생활 및 신자 공동(共同)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례를 위한 운동을 크게 일으켜야 할 줄 안다.
1903년의 비오 10세의 회칙(回勅) 「모뚜 뿌로 쁘리오」는 「그레고리안」성가를 전세계(世界) 교회에서 사용하도로 명령하면서 전례운동(典禮運動)을 촉진하도록 당부하셨다. 사실 각국에서 이 전례운동을 중시하고 그곳의 전례「센터」를 지어 거대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작년 「니메겐」에서 있은 국제전례회의에는 한국을 대표하여 서울 <바오로> 노 주교께서 참석하셨으며 금년은 「뮛니히」 국제성체대회를 기하여 그곳서 같은 회의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전례는 또한 건축 미술 조각 음악 등의 예술전반은 물론 문화 전체에 긍한 가장 귀중한 표현(表現)인 것으로 여기 동원될 터전이란 광대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때문에 사제의 권위자를 동원하여 조속히 한국 전례「센터」가 세워지고 전국적인 운동이 전개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