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아뢰는 말씀
우리 말 우리 글의 독특한 성질과(Genlum Ilnguae) 그 우아미묘(優雅美妙)한 문장필치(Liternry Omposi_n)의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우리 순교선렬들의 경건무쌍한 그 수고와 노력의 금자탑으로서 그들의 손때 묻고 그들의 피에 적은 우리 「옛공과」는 비단 천주교 신자 전원에 대한 천주공경에 관한 유일무이한 공동적 「경본」(Officium Brevlarium) 즉 글자 그대로의 「신공책」임과 동시에 또한 「신학서」(神學書)일뿐 아니라 「우리말」의 전통적 본 성질과 그 특색 그리고 「우리글」의 아름다운 그 문장 그 필치를 남김없이 살려놓은 실로 우리 온 겨레의 가장 우수한 「민족문화재」의 하나로서 「민족적 보배」요, 사랑거리인 것으로서 과거 이 「공과」 특히 그속에 실려있는 「성체 전 후 속」 등의 그 아름다운 문장과 필치에 흘려서 귀화한 자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던 마치 또한 훌륭한 선전용(宣傳用) 호교서(護敎書)도 되는 것이다.
그렇거늘 최근에와서 이 다름다운 문장 필치의 「옛공과」가 그 어떤 서투른 솜씨에 짖궂은 장난으로 말미암아 얄궂은 「시체화장(時體火葬)으로 변모되어 감은 실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 실정이다.
사실은 여러해 전부터 여기에 대한 (특히 그 형식면 즉 문장면(文章面)에 있어서) 개탄과 불만을 느껴왔고 심지어는 『우리 치명조상들의 그 피묻은 「공과」를 필요이상 뜯어 고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손한 「대접」이 아니라』는 말로써 필자 그 관계자에게 충고한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마 교리상 위반까지야 안가겠지』하는 마음과 특히 『나 아니라도 필경엔 문제 일으킨자 반드시 나오겠지』하는 자위(自慰)에서 그대로 관망해 오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금년 「가靑지」 8월호 목차에서 이숭녕(李崇寧) 박사의 『성경과 경문의 문장의 어학적 주석』이라한 제목을 발견한 필자는 그분의 우리말에 대한 권위를 잘 알기 때문에 『옳다 이제는 되었다』라는 기대에 넘치는 마음에서 옷깃을 바로 잡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읽어 보았다. 그러나 필자의 그것과는 그 거리가 너무도 멀었기 때문에 여기대한 일루의 기대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달 「경향잡지」 9월호에 『신구송과의 용어해설』을 위한 질문(새 공과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말한 『용어』란 용어(用語)라기 보다 차라리 『용語』 즉 『필요없이 수다스럽게만 한 말』을 뜻함일 것인데 그 대답은 오로지 『用語』로만 알아들은 탓으로 매우 모호한 것이어니와)에 그 해결 방법은 새공과책에 맞추어 정정(訂正)함이 좋다』라는 해답을 내림과 동시에 『주교회의의 결의를 거쳐…… 통일을 기하기로 하였다』라 하였을 뿐 이 대답 역시 그 가려운 데를 긁어주지 못한 채 그대로 넘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그 근본적 탐구, 연구, 또는 그 비판적 제안조언(提案助言)이 없는 한 이 문제를 주교회의에 붙여 보았자 단지 『새 것이 진보적』일 것이라는 선입겨에서 무비판적으로 『새공과』를 그대로 받아드릴 우려성이 없지 않겠다』는 조바심을 느끼는 한편 또한 이웃 신부 한분의 간곡한 충고도 있고해서 한국천주교의 공동선(共同線) 문제를 사적(私的)으로나마 정중히 연구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