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本論)
이 새로운 탐구조사의 결과 눈에 뜨이는 것이 신철자법대로 고친 것은 제외(이는 당연한 일이언만 그것도 마치 『하늘로 좇아』로 고쳐야 할 것을 구철자 그대로 『조차』로 남겨둔 것이 약 30여군데나 됨)하고도, 그 『필요이상』이라기 보다 차라리 거의 그 전부가 『장난 삼아』 또는 그 어떤 말(예를 들면 『애긍하는 덕』을 『애긍히 여기늰 덕』 『오롯하고 오롯한 마음』을 『오로지고, 오로진 마음』, 『베로니가 예수의 얼골에 피 땀… 보고』를 『예수의 얼골에서 피 땀…을 보고』, 『영혼이 신명에 나고 자람을 주사』 를 『신명에서 나고 자람』 『신비한 덕』을 『신비로운 덕』 등등으로 고친 것) 들에 있어서는 전연 우리 말을 모르는 외국인의 무지·무식(無知·無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솜시로 마구 뜯어 고친 것 만이 2천(2000)여 군데 이상인데 이 고친 2천여건 중에 『옳게 고쳤다』고 보이는 것은 겨우 4·5건에 불과하고 남아지 거의 그 전부는 『옛공과』를 가위 『망쳐놓은 것』(옛 공과의 것을 몽땅 빼 버린 것도 4·5처나 되는데 그 자수로는 약 68자)으로서 그것들을 본보기로 그 몇가지 식을 추려 보면 대강 아래와 같이 네 종류로 노눌 수 있다.
1, 옛공과의 말뜻을 『망친것』 약2백(이중에 중복된 것도 간혹 있기는 함)
2, 옛공과의 말마디(단어)를 『바꾼것』 약 1백40(본보기로 몇가지만)
3, 옛공과의 글짜수를 『늘린것』 약1백10(본보기로 몇가지만)
4, 옛공과의 글짜수를 『줄인것』 약1백(본보기로 몇가지만)
이상의 것을 대조표(對照表)를 만들어 독자제위께 보여드리고 그중 본보기로 몇몇군데를 설명하겠는데 먼저 새공과에서 우리 월(文章 文句) 구성면에 있어서와 교리면(敎理面)에 있어서까지 어느정도 『망쳐놓은 것』이 있음을 몇가지 설명하고저 한다.
(가) 우리 월(文章 文句)의 구성면에 있어서, (1) 혹은 우리 월의 독특한 그 문어체(文語體)와 구어체(口語體)를 전연 분간 못하므로써 그 전체가 훌륭한 그리고 순수한 문어체로 구성된 『옛공과』에다 어울리지 않는 구어체(예를 들면 『나 하노니, 나 믿노니』를 『나 하느니·나 믿느니』로 『나에서 얼마나은』을 『나 보다』로 『하나니라·있나니라』를 『하느니라·믿느니라』로 『죽기에 이르히』를 『죽기에 이르기까지·도록』 등등)를 일부러 뒤섞어 놓아, 적이 우리 『말·글체』의 구성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는 고치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 문체를 모조리 구어체로 바꾼다면 모르거니와) (2) 혹은 우리말·글의 성질이, 본래 운율적(韻律的)임으로서 (그 구절·구절의 자수(字數)가 대체로 혹은 동동동·동동이(同同同·同同異) 혹은 이동동·동이동(異同同·同異同)으로, 끼리 끼리 서로 『월의 고름(句節調和)을 이룸이 마치 저 어족적(語族的)으로 우리 말의 조종인 우랄 알따이 어군(語群)의 공통적인 소위 『홀소리 고룸(母音調和)과 비슷한 것 잔잔히 흐르는 물껼과도 같이, 막힘없고, 걸림 없이, 조자정(調子整)히 순순히 흘러 내리는 것이 그 특색(예를들면 「예수 성심께 마음을 드리는 경」이나 「성모 통고사」나 「성체 전후송」같은 것을, 서양글 혹은 일본글 읽는 식으로 말고, 우리글 혹은 베트남글 읽는 식으로 주욱 내려 읽어 보면, 그 묘미를 맛보리라) 입을 전연 깨닫지 못한 탓으로, 『옛공과』에 그 조화를 살리기 위하여 구절·구절간에 한자 더한 것은 일부러 빼고, 한자 덜한 것은 짐짓 더 넣고 해서, 그 구절·구절의 말 마디를 한사코 「늘리고·줄이고」 해놓았기 때문에 읽는 자로 하여금 「마음 놓고 내 닫는이 앞에 웬 철조망이 이처름 많이 늘어 놓였을까?」하는 감을 주도록 『옛공과』를 망쳐놓았다.
(나) 교리면에 있어서 「잘못된 것」(예를 들면 45처 빼먹은 것은 아직 논외로 하고도 「신비한 덕」을 「신비로운 덕」 「다섯 가지 묘한 뜻」을 「오묘한 뜻」으로 「원수의 작란」을 「장난」으로 「은사를 얻어」를 「은혜」로 「망작」을 「망측」으로 「평생의 죄」를 「평상의 죄」로 「진짓 이한 칼날이」를 「짐짓 이한칼날」로 「주제(主祭)」를 「주제(主宰)」로 「진도를 밝게(踏)」를 「밝게(明)」로 「진짓 속죄하는 죄」를 「짐짓속죄」로 「패한성의 정」을 「부패한 본성의 정」으로 「영혼이 신명에 나고」를 「신명에서 나고」 등등)도 한구 가지만이 아님을 볼 때 이런 「새공과」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드리고, 날마다 이것으로써 「신공책」으로 사용하고 있는 교우들, 특히나 부림의 그 무심·무책임함에는, 통분하다기 보다 오히려 「허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계속>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