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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7면=새공과에 「죽은자 가운데로 조차 다시 살으심…… 저리로 조차 심판하러 오실줄을」 이외에 약 30처에 「조차」를 옛 철자 그대로 남겨두었음은 잘못이다.
필자 철자법까지는 그닺 관심하지 안했으나 「쓸가스러·쓸가스르며」(582면·643면)를 제하고는 대체로 탈잡을 것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이 「조차」들 만은 「좇아」로 고쳐야 할 줄 믿는다.
새공과에 이것들을 그대로 둠은 필시 저 「마춤법 통일안」(1933년 초판) 제20항에 「조차·부터·마지」 등은 종전대로 둔다 하였음을 이 「조차」와 저 「조차」를 분간 못한 탓에 기인한 듯 하나 저 것은 여기 말하는 「조차」와는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저 「마춤법」에서 말하는 「조차」란 그 실질적 관념이 없는 허사(虛詞)로서 「도·따라서」의 뜻으로 그 윗말을 강조하는 토씨(助詞) (예를 들면 「상판도 험상 궂거니와 말씨조차 거칠다·너 조차 그럴줄 몰랐다」) 임에 반(反)하여 여기의 「조차 즉 좇아」는 제 실질적 관념을 가지고 반드시 「로·으로」 토씨 밑에 붙는 버젓한 움직씨(動詞)의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⑤ 22면=「나는 이에 적고 적은 것이라 털 끝만치도 갚을 능이 없으니」의 「적고 적은 것」을 새공과에는 「작고 작은 것」으로 고쳤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 보면 大小는 「크고 작다」로 多少는 「많고 적다」로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 「티끌 만치도 갚을 능이 없는」이 「적고 적음」이 어찌 하필 「大小」로만 되어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저 「적고 적은 벌레」를 「작고 작은 벌레」(160면)로 고친 것쯤은 접어두더래도 「평생의 크고 적은 원수」(626면)를 어째 하필 「트고 작은 원수」로 고칠 필요는 없다.
키(身長) 또는 몸집이 몇 자부터 몇자까지를 「큰 원수」 또 그리고 몇 근부터 몇 근까지를 「작은 원수」로 칠 것인가 사실은 여기 말한 「크고 작은 원수」란 그 물체적 大小보다 차라리 그 질량적(質量的) 「다과(多寡)」또는 「다소(多少)」를 뜻함인즉 「크고 적다」를 구터이 「크고 작다」로 고칠 필요는 없다.
⑥ 새공과에는 옛공과의 「하나니·비나니」 등등 실로 6백여처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하오니·비오니」 등으로 바꾸어 놓으므로써 무심코 읽는 자로 하여금 「왼 비(雨)가 사방에서 이처럼 많이 오는고」하는 감을 제절로 느끼게 한다.
여기 대한 어법상(語法上) 설명은 너무 장황하므로 그만두기로 하거니와 무엇보담도 옛공과에 「임자씨(體言)」를 설명해주는 「풀이씨(用語)」로 쓰이는 경우를 제외(예를 들면 「당치못하오나」 「얻지 아니리 하오니」 「행하기를 원하오니」 등등) 하고는 단순한 「구하나니·비나니·바라나니」 등으로 시작되고 그치는 말들에는 그 6백여 군데 중, 단 한번도 「구하오니·비오니·바라오니」로 하지 안했음만 보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구하나니·비나니」 등이란 저 「구하던대·빌건대」와 똑같은 뜻으로서, 그 대상이 「간접적인 천주」보다는 차라리 「직접 임자씨인 自我」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오꼴(예사높임)」로 고치기 보다 차라리 「합쇼꼴(아주높임)」로 하여 「구하옵나니 비옵나니」로 하는 것이 「비오니·눈오니」로 들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한다.
⑦ 22면=옛공과에 「영신이 조찰하여 써신후… 누리게 하소서」와 같이 「무엇을 하여, 무엇을 함으로써 무엇이 되게한다」는 뜻의 이 「써」가 끼인 구절 전부 (22번 이상)에서 새공과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빼버렸다. 예를 들면 31면에 「네 천신의 무리를 머물러써 우리를… 평화케」를 「머물러 우리를…」로 「은혜를 주사써 선인은 천당에…」를 「은혜를 주사 천당에…」로 등등
위에 말함 같이 이 「써」 란 가위 윗말을 뒤풀이 하는 「이렇게 함으로써」 혹은 「이로 말미암아」 또는 「이리하여 하여금」의 뜻을 가진 「토씨」가 아닌 버젓한 「움직씨」(일본말에서는 이것을 몬데(以)로 새기는 동시 「이음꼴(接續詞)」이라 함)인 것이다.
그렇거늘 새공과는 없는 「하여금」은 수십군데 일부러 더 넣음으로써 「구절조화」를 문란케 하는 만면에, 이 있는 「써」는 일부러 모조리 뺌으로써 역시 이 조화를 깨뜨렸다.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