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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38면=연미사 끝네 “레귀에스깟”은 “레귀에스깡트”로 고쳐야 한다. 왜냐하면 전례학(典禮學)에 의하면 “연미사”란 그 성질로 보아 비록 사적예식 (Liturgia privata)에 속한 것이나 미사 그 자체로는 그 근본 성질이 본질적 그리고 정작 “레이뚜르고스(공동적·집단적)”이기 때문에 그 드리는 “연미사”의 “대상”이 경우에 따라 비록 한 개인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모이신 성교회의 그 “저의(底意)”는 언제나 “죽은 모든 믿는 자”를 생각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동행사(共同行事)”인 “미사”에 한해선 언제든지 반드시 그 “복수(複數)”를 쓰는 법이다. 그리고 연미사 끝에 “레귀에스깡트인 빠체”는 벌써 13세기부터 보편화된 것이다.
20. 144면·149면·151면=옛공과의 “얼마 사람” “패역하여” “공의에 상해 온”을 새공과에선 모두 뜯어 고쳐서 “많은 사람“ “배역” “공사의 상해온”으로 햇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고, 특히 “에”를 “의“로 고친 까닭을 깨닫지 못하겠다.
21. 152면= 옛공과에 “주 예수의 성혈 공로와, 성모 마리아와 ……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은사(恩赦)”를 얻어 “보속”의 부족한 것을 “갚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한 이 “은사”를 일부러 “은혜”로 고친 의도를 알아낼 길이 없다.
“은혜(Gratia, vel donum gratuitum)”와 “은사(Indulgentia)”와는 천양지별이요 여기 그 상하문맥을 보아 “은사”가 틀림없다.
22. 168면=옛공과의 “참 진복이요 …… 참 진화라”함에서 새공과는 두군데 다 “참”을 뺐는데 이는 필시 “진복·진화”에 이미 “참 진짜”가 들어 있으니 쓸데없다는 뜻인듯 하다. 그러나 “Beatus vel Beatutudo”를 우리말로 “진복자·진복”이라 함과 동시에 이 세상 부귀영화를 “Beatitudo”라 할 수 있다. 우리 신학에서도 사람의 종극 목적을 증명할 때, 으례히 “Vera Beatutudo con sistit……(참진복이……)”이라 하였다. 우리는 “진복·진화”를 한 “고유명사”로 본다. 고유명사로 본다면 “참”짜를 부쳐도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리라.
23. 175면=옛공과에 “천당길로 달아 죽기에 이르히” 한 것을 “천당 길을 따라”라 하였으니 “닫다(走)”와 “닳다·따르다(隨)”와는 뜻이 크데 다르다. 여기 “천당 길로 달아”가 옳지 “따라”라 하면 아무런 뜻이 없다.
24. 179면=옛공과의 “뉘 능히 나를 예수……의 사랑에 떼이리요·우리를 오주 예수 …… 사랑함에 갈리이게 못하리로다”를 새공과에는 “사랑에서 데리요·사랑에서 갈리게”라 하여, 두번 다 “이”짜를 뽑아 버렸다. 이것도 우리 어법·문법(語法·文法)에 크게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문법에 “제움직씨(自動詞)”나 “남움직씨(他動詞)”나를 막론하고 그것을 “시키움직씨(使役動詞)”로 변경할 때에는 그 “시킴 도움 줄기(使役補助語幹)”인 “이”(또 윗말의 경우에 따라 “리·우·기” 또는 “히·키·구”도 쓰이는때도 있지마는)가 반드시 붙는 법이요, 그것을 “입음움직씨(被動詞)”로 면갱할 적에는 그 “입음도움줄기”인 “히·기”가 만드시 붙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 말하는 “사랑에 떼이리요”는 분명히 “떼다”라는 “남움직씨”에다 “시킴꼴”인 “이”를 붙여서 “시킴움직씨”로 만든 것이고, 뒤에 말한 “갈리이게”는 “갈리다”라는 “제움직씨”로 화(化)한 것, 이런 따위를 “도로된 본대 움직씨(還元本動詞)”라고 부르는 이도 있음)에다 “입음꼴”인 “이”(실상은 “히”)를 붙여서 “입음 움직씨”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떼리요”라 하면 甲이 乙을 그 무엇에서 “잡아뗀다”는 뜻이고 ”떼이리요”라 하면 나를 그 무엇에서 “떠러지게한다”는 뜻이 되고, “갈리게”라 하면 내가 갈리는 것을 그 “시킴꼴”인 “게”를 더해서 ”갈리라고 시킴”뿐이요 ”갈리이게”라 하면 그 무엇에서 “갈림을 받으라고 시키”는 뜻이 된다.
이상 22·23·24는 모두 “고해 및 성체 전후송”에 나오는 것인데, 옛공과의 이 “성체전후송”의 그 아름다운 “문장·필치”에 홀려서, 귀화한 사람도 있다. “옛공과”라 해서, 그 전체가 한 시대 한 사람한테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때에 흐름에 따라 “새 기도문”이 참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이 우리말. 글의 조예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즉시 “구·신(舊新)의 꼴을 알아볼 수 있더니와 “옛공과”에 (필자 대조용으로 사용한 석인본 즉 “목판본(木版本)을 가르킴) 실린 것은 거의 다 휼륭한 중 특히 “미사경·그리고 예수성심께 마음을 드리는 경·성모통고사 ” 등등이 가장 걸작으로 본다. 그 중 좀 열등으로 필자 눈에 뜨이는 것은 “예수성영찬미경”인듯 하다. <계속>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