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신자 된 자 내세에 더 가까이 갈수록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기력(無氣力)한 태도를 버리고 온갖 죄에서 점점 벗어나며 그리스도의 덕행을 가져 어두움의 권을 거스려 자신을 방호(防護)할 것이다』(로마서 13장 제3항) 「로마」 제국(帝國)의 수도에 있던 신자들에게 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기력한 태도」를 버리라고 한 말씀을 자기에 대한 의무(前記 제3항)라는 표제 아래서 타이르셨음에 그윽히 되씹어 볼만한 데가 있는 줄 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는 무기력하다 혹은 지극히 소극적이다 하는 소리가 단지 자기 반성의 또는 자기편달의 그런뜻으로서의 겸허한 표현만은 아닌듯하다.
우리사회서 흔히 종교인을 지칭하여 무기력하고 무저항(無抵抗)의 존재로 미루고 있음은 첫째는 불교의 부세(浮世) 운운하는 선립견(先入見) 내지 비현실적 생활태도에서 연상한 한갓 피상적 살핌이기는 하리라. 가톨릭교회가 처름부터 한국의 거센 환경아래 어떻게 저항해왔고 선혈(鮮血)을 뿌려 진리를 수호하던 그 기상(氣象)을 옳게 보지 못했으며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 이후는 적극으로 한국사회의 개조(改造)에 참여(參與)한데 전연 무지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만일 가톨릭신자는 무기력하다는 소리가 현실을 짤라서(切斷) 사실 그대로 평가할 때에 그렇게도 말할수도 있다고 한 것이라면 이에 더한 정신적 해이(解弛)를 대담하고도 솔직히 지적한 말은 없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무기력」을 두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단체로서의 그것이다. 허나 실상은 이는 양분(兩分)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더말할 것 없다. 그 한 예(例)로서 어느 국제기관으로부터 한국의 가톨릭의사(醫師)가 몇명이냐는 조회를 받고 이를 찾아볼 출판물도 없거니와 알아낼 길 조차 없었다. 한국의 가톨릭의사가 몇명이건 그런것을 알아서 뭘 할 것이냐 하는 것이 한 통념(通念)쯤은 되었다고 하면 좀 가혹한 말일까. 이런 일은 비단 가톨릭의사에 한정된 일은 아니다. 각 직업 분야에 있어 그 어느 한곳도 가톨릭신자이기때문에 그들의 공동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노력이 뚜렷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마저 그러하다.
우리는 먼저 지도층에 있는 한국가톨릭지성인들에 국한하여 그들이 단결하여 공동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여 감히 말하고 감히 행동할 수 있을 것을 촉구해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본당을 단위로 본당신부의 지도아래 강력한 조직체를 세워야 할줄 안다. 지난날의 수많은 경험이 명시하는 그대로 어디까지나 본당신부의 주재와 그 완전한 지도아래서 지성인의 크럽이 세워지고 행동으로써 그 실(實)을 거두어야 하며 그런 조직은 피라미트식으로 조만한 전국적으로 발전하고 다시 국제적 같은 성격의 기구(機構)와 연결됨으로 그야말로 세계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할 수 있게될 것이다.
레지오 마리에가 단시일에 그같은 발전을 하고있는 것도 조직적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 어떤 방법론을 들고나설 겨를은 없다. 앞서 지적한대로 한국가톨릭지성인들이 그 행동면에서 극도로 침체(沈滯)된 채 이를 불어일으킬만한 아무런 손을 쓰지지않고 있음을 그대로 시인(是認)해야 할 것과 그 까닭이 첫째는 개인의 무성의와 둘째는 거기 무대책(無對策)인 우리의 형편을 반성할 것이 시간적으로 화급(火急)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나는 교우이다」하는 것을 좀더 또렷이 해야한다. 주일과 첨례날에 성당에 갈때만 내가 교우인 것을 의식(意識)하고 직장에 나갈때 사업과 사교의 장소에 나설때는 전연 교우인 것을 의식치 못한다고 하면 이보다 더한 모순과 이중(二重)의 인격은 없다. 그것은 바로 양심(良心)의 분렬(分裂)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어떻게, 성당에 갈 때와 같이 직장에서도 틀림없는 교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마땅히 지도층에 서야할 가톨릭지성인들의 단결의 방도를 찾으라고 하는 바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기력(無氣力)한 태도」를 버리라고 한 <성 바오로>의 말씀이 바로 자기에 대한 의무한 표제하에 쓰진 것임을 되씹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