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略
이 문제에 대하여 먼저 그 경과부터 약언하면 지난 1959년 겨울에 내가 발표한 일종의 팜프렡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그때 그 「서언」에도 말했음같이 그 해 9월호 경향잡지에 「신·구공과의 용어해결」을 위한 질문에 대하여 『그 해결방법은 새공과책에 맞추어 정정함이 좋다』라는 해답과 함께 『주교회의의 결의를 거쳐…… 통일을 기하기로 하였다』라는 해답이 실려있음을 본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그 근본적 탐구, 연구 또는 그 비판적 제안조언(提案助言)이 없는 한 이 문제를 주교회의에 붙여보았자 단지 『새것이 진보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무비판적으로 「새공과」-즉 현행하고 있는 그 『지꿎은 장난』으로 말미암아 얄궂은 『열교정신』으로 날로 변모되어 가는 「그공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드릴 우려가 없지 않겠다는 조바심에서 한국가톨릭의 「공동선」(共同線)을 위하여 이 문제를 사적(私的)으로나마 정중히 연구한 후 발표했던 것인데 경제문제도 있을 뿐 아니라 교회내의 가장 심각한 이런 문제를 외교인들은 물론 일반신자에게도 알리기를 꺼리는 마음에서-물론 순진한 신앙에서 「천주교공과」라면 으례 신성(神聖)한 것으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신자들에게 뜻하지 않은 신앙의 현혹(眩惑)을 이르키지 않기 위해서-단지40권만을 프린트해서 오직 성직계내(聖職界內)의 집안사람들에게만 서울 노주교님을 비롯하여 모든 한인주교 이하 몇몇 신부에게 보냈던 것이다. (평신자로는 단지 이숭녕박사 한 분에게만 보냈는데 그 의도는 그의 말이 졸고 「서언」에 실렸기 때문에)
그리하는 한편 다음해 봄에나 열릴 줄 알았던 「주교회의」가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해 11월 초에 열린다는 소식을 「가톨릭시보」에서 비로소 알게 된 나는 너무도 초조당황한 나머지 시작한 일을 속히 서두르는 한편 즉시 춘천 구주교님께와 교황사절관에 특별 배달인을 보내어 공과에 대한 「결의」만은 뒤에 차차 일반여론을 들어서 처리하실 때까지 금번 회의서 「보류」해주실 것을 탄원하는 「서한」에 그 이유로 문제의 팜프렡 끝에 쓰인 「결론」에서 두어 구절을 번역 전달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후 들으니 그 어느 주교님의 제안으로 그 문제는 결국 2·3년 후(즉 「바티깐」공의회 후)로 미루어지는 동시에 「공과편찬위원회」를 조직해서 일을 진행해 나갈 것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한 뒤에 여러 곳에서 공명찬동(共鳴贊同)과 아울러 과분한 찬사(讚辭)까지 받게되어 되려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논문 첫장에 『여러 어른들의 찬부간(贊否間)에 관한 공론(公論)을 듣자함에 있으므로 기탄없이 고견을 말해 달라는 부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군데서도 그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안했었다.
여기 그 몇 가지만을 견본으로 실리기로 하는데 나의 본정신이 신부들의 머리를 꺠우쳐 드림과 아울러 그 공론(Opinio Publica)을 들음으로써 교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 다른 사심(私心)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윤형중 신부님께 그 소책자를 보내었던 것이다-이에 그 몇 가지 대표적 회답은 대략 이러하다.
1. 현행 새공과 출세당시에 출판ㄴ부 담당자이시던 윤형중신부님은 이렇게 회답하셨다. 즉 『…… 수복 이후 어떤 대학에 강사로 다니고 한글학자이요 국어학자라는 어떤 교우가 시대에 맞도록 공과를 고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최소한도로 고쳐보라고 하였더니 그 꼴이 되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찌 주신부님께 먼저 문의하여 보지 않았나 하고 후회됩니다만 이미 늦었읍니다…… 신부님의 판단이 옳을 것을 믿는 바입니다. 고칠 것은 어떻게든지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문제를 걸기를 잘하셨읍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부사회에고 교우사회에고 그렇게 알아보아 문제를 걸 만한 이가 없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속수무책인 이런 경지에 떨어져 있어 어찌할 수 없으나 여하간 잘못된 것은 바로 잡히기를 원하는 바입니다』라 하셨다. (여기 대한 나의 느낌은 이 아래)
2. 서울교구의 부주교님 <바오로> 신(申仁植) 신부님은 라틴말로 대답하셨는데 그는 이르시기를 『…… 정말 나도 나 비록 자네처럼 모든 것을 그다지 유심히 연구해보든 못했지마는 하여튼 나도 공과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던 중(Cert et egon on gau e-bam) 그 보낸 논문을 읽고 보니 더욱 자상히 더욱 낫게 알아듣겠네 이제 남은 문제는 올바르게 고치는 것 밖에 더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네』라 하였고
3. 서울주교관내 출판부담당 김(金玉均) 신부님은 대답하시기를 『…… 그리고 우리 공과에 대한 연구원고는 참 유익하게 읽었아오며 저로서는 전혀 모르던 일이고 보매 더욱 유익하게 읽었읍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점에 연구를 거듭하시는 신부님이 계신 것을 반가히 생각하오며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또한 이 미약한 몸이 맡은 출판사업에 적극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고
4. 전주교구 신부님 한 분은 말씀하시기를 『…… 뜻밖에도 큼직하고 귀한 보물을 매수하여 즉석에서 끝까지 읽어뵈옵고 한편 놀라며 한 편 통쾌함을 금치 못하였나이다. 신부님 어쩌면 그처럼 세밀하시고 항구하시게도 살피시어 얼마나 피로를 느끼시며 일하셨나이까. 황송하오나 주교들 중에서도 이 귀한 원고를 끝까지 유의하게 읽으시기나 하시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실지 생각하오며 참으로 무어라고 말씀드려 옳을지 모르겠나이다…… 신부님이 이처럼 치밀하게 논박하시고 일하시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답니다. 여기에 대한 효과야 있던없던 신부님으로서는 하실 일 하셨을 뿐 아니라 후세에라도 그만큼 큰 경종을 울려 남기신 것임을 깊이 감사하나이다……』라고 1959년 11월15일에 편지하시더니 또다시 1960년 1월2일의 편지 중에 『……공과를 위하여 아니 성교회를 위하여 크고 많은 일하신데 대하와 주교단으로부터 혹시 무슨 반응이 있읍니까, 의심없이 크게 놀랐을 줄로 믿나이다… 이웃 신부께도 뵈었더니 그 역시 놀라시며 신부님의 노고에 또한 탁월하신 정신에 강복하여 주장하시는 일이 성취되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朱在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