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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공과 548면을 보면 옛공과와 “성부 베로니가 예수의 얼골에 피땀과 침의 더러움을 보고”를 새공과 개찬자는 의심없이 『예수의 얼골에서……보고”라고 그야말로 진짓 고쳐놓았다.
필자의 불민함을 책할는지는 모르나, 여기에 여러가지 뭇알아듣는 점이 많다.
첫째 베로니가가 “예수의 얼골에서 피땀을 보았으니” 베로니가가 본 그 피땀은 “누구의 피땀인지”? 둘째 베로니가가 그 피땀을 하필 “예수의 얼골에서 보았으니” 베로니가는 그 피땀을 보기 위하여 “어떻게 예수의 얼골에까지 기어올라갔는지”? 혹은 “파리모양으로 그 얼골에 날라가 붙어서 보았는지”? 이 모든 점이 필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이 “에서”는 우리 문법에 소위 ”곳 자리 토(處所格助詞)”라는 것 중 하나로서 (이 “곳 자리 토”엔 “닿는데” “떠나는데” “향하는데”의 세가지가 있음) “닿는 데 곳 자리 토(落着点處所格助詞)”인데, 이것은 그 닿는데가 사물(事物) (時와 處所까지)일적에는 “에·에서”가 쓰이고, 사람일 적에는 “에게, 한테”(예사때) 또는 “께”(존경)가 쓰이는 법인데, 이 “에서”의 뜻인즉 “에 있어서” 또는 “에 자리잡아서”이다. 그러므로 이 “에서” 및에 다른 동사(例=흐르는·솟는 피땀)가 없이 단지 “보고” 동사만이 따라온다면 이 “에서”는 오직 “보다(見)”의 “곳 자리(處所)”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개찬자가 “서”를 너무 필요 이상 즐기다가 이런 실수를 하게되니 실로 민망하고도 답답하게 여긴다.
옛공과에 있는대로 “예수의 얼골에” 즉 “얼골에 있는·묻은 피땀”(Infacienonex facie)을 뜻할 적에는 결코 “얼골에서”라 고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약 10년전 공과에 버적이 실려있던 “일본치명성인 26위” 첨례가 새공엔 빼어렸는데 이것은 언제부터, 누구의 권위로써 “폐지”되었는가? 그 폐지된 증거를 누구 보다도 더 반가이 알고싶고 보고싶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민족적 감정에서 따잘 때 40년간 그들의 철사주사(鐵絲蛛絲)에서 풀려나온 우리로서 그들의 지배하에서 생겨난 “찌꺼기(殘宰)”란 무엇이고 다 걷어 치어버려야 할 것임은 우리 온 겨레의 정기(正氣)로서 필자 역시 그 정기에 찬동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보천하 봉교인(奉敎人)이 한가지로 한몸과 같이 한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가톨릭 정신에서 볼 때도 그리고 만사에 있어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 교황 성부의 지령에 따라, 움지기고, 또 움지겨야 할 우리 가톨릭자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성청에서 한번 마련한 것이라면 그의 새로운 “결재”가 없는한 그대로 복종하여야 할 것이어늘 해방후 1950년 2월 23일부 “전한국 주교회의”의 결의중 “제6항”에 “일본 26성인첨례는 로마에서의 새로운 지령이 내릴때까지 종전대로 지내기로 한다”라 한 “결의”가 버젓이 남아있는 한 누가 누구의 권위로써 이를 폐지하였는지 알고싶고, 따라서 일본서도 우리 “79위 복자첨례”를 언제부터 “폐지”하였는지 또한 알고싶다. 아니라면 어느 모로 보아, “교황청의 (Institia Commutatva)에 관계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우리 그 “26성인” 첨례를 지낸다고 해서 손해되거나 망신될 것이 조곰도 없을뿐 아니라, 도리어 영원히 “우리 승리의 기념이고 산증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일본 첨례는 “성인첨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선 겨우 Duplex(4등첨례라 할까)뿐인 반면에 우리 79위 복자 첨례는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한갖 “복자첨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서는 (Duplex 2 classis) (버젓한 2등 첨례)로 지내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 겨레에 대한 교황 성부의 이같은 “특별대우”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싱싱한 “승리적 기념”을 어찌 하필 말살할가 보냐.
朱在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