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와 신문호외(號外)가 공산군의 남침을 알린 것은 어느 주일 흐린 아침이었다.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잇달아 내다 붙이는 벽보는 모처럼의 일요일을 무거운 침묵과 불안과 소란 속에 몰아넣고 말았던 것이다. 고막을 뚫는 각종의 포성(砲聲), 먼지투성이가 된 군인들을 나무가지로 덮어싣고 질주하는 군용차량, 우왕좌왕(右往左往) 허덕거리며 거리를 메운 피난민, 시민을 기만(欺瞞)하며 거리를 진정시켜보려고 떠들어대는 경찰차의 스피-카-, 수도 서울에 어두움과 함께 벌써 적군(赤軍)의 발길이 닿았고 검은 하늘에서는 눈물아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사방에서 따발총·기관총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6월 25일이 지나갔다. 그러나 달력(日曆)은 공산군이 38선을 완전히 넘어서는 날까지 그대로 남아있었을 뿐 아니라. 10년을 지난 오늘도 지긋지긋한 회상을 통하여 그 해(太陽) 없는 세계는 우리와 함게 남아있다.
시간을 따진다면 긴 세월은 아니었으나 우리들은 몸서리쳐이는 공산치하에 살아보았고 그들의 침략을 간신히 면한 대구·부산지구에 살던 사람들도 체험에 못지않게 보고들어 6·25라는 한마디로 서로 같은 회상에 사롭잡히게 된다.
공산군이 노린 것은 결코 이 좁은 적산박토(赤山薄土)인 한국의 남반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근본사상이 대립되어 있는 자유진영의 정신사회를 공략(攻略)하는 수단의 하나로서 이 땅을 침공하였던 것이며 우리들의 사상무장(思想武裝)이 불완전함을 알고 감히 총구(銃口)를 내밀었던 것이다. 붉은 군대 뒤에는 언제나 세계적화(世界赤化)를 위한 사이비(似而非) 이론이 세뇌공작(洗腦工作)을 준비하고 있다. 방공(防共)은 이 나라의 국시(國是)이다. 그러면서도 대중(大衆)에게는 공산주의가 충분히 비판(批判)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위협과 탄압과 궤변(詭辯)에 넘어가는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공산주의의 강적(强敵)은 그들이 소위 아편(阿片)이라고 부르는 종교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가톨릭교회라는 것은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가톨릭신자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갖은 술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사상은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서 출발한다. 신(神)은 약자(弱者)가 의지할 곳을 찾아 만들어낸 가상물(假想物)이며 종교는 겁많은 약자들이 믿는 미신(迷信)이라고 폭언한다. 인간의 궁극목적은 이세상에서 잘먹고 잘입고 잘사는 데만 있다고 하며 인간사회의 모든 변동은 경제생활의 변화에서 온다고 한다. 이 변화는 결정적이며 의례히 봉건사회는 무너저 자본사회로 변하고 자본사회는 무너저 공산사회로 변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완성된 공산사회는 노동자의 전체사회이며 국가와 법이 없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가리켜 「부르죠와지」(유산계급)가 「프로레타리아」(무산계급)을 착취하는 기관이라고 하며 법은 그 착취수단이라고 독단한다. 공산사회에는 착취계급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기관과 수단인 국가와 법이 소용없는 무정부사회(無政府社會)가 이루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가장 강렬한 방법으로 무자비한 계급투쟁(階級鬪爭)을 감행하여 하루빨리 노동자만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는 역종(役種)의 여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공산주의자는 다 노동자라고 하며 그나라 수상(首相)인 「후루시초프」는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노동자로서 자처(自處)하고 있을뿐 아니라 모든 노동자는 다같이 무산계급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한다. 현재 공산국가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비참(悲慘)과 피흘리는 투쟁과 숙청의 책임이 모두 「부르죠와지-」에 있다는 궤변으로 백성의 불평과 원한을 「부르죠와지-」에게 전가시키기에 급급한 그들은 오심(奧心) 노동자 계급만의 사회를 건설하기는 고사하고 소위 「부르죠와지-」라는 명패를 부칠 수 있는 계급이 있다는 것을 다시 없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공산주의로 귀화하는 것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가면(假面)을 쓴 가장 단결이 잘되어 있는 정당(政黨)이라고 보았으며 그 적성(敵性) 정당의 파괴공작으로서 교황을 욕하고 교회가 국가별로 독립하도록 책동하며 성직자와 신자간의 이간을 꾀하고 신앙이 약한 신자의 관능적 욕망을 충동하여 배교(背敎)를 권하며 갖은 감언(甘言)이설(利說)과 궤변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정당시(政黨視)하여 갖은 음성적 수법으로 가톨릭교회를 탄압하여 오던 독재정권이 용감한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만방의 환성과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제2공화국이 맞이하게된 6·25의 교훈이 없었던들 이번 혁명이 과연 적화운동(赤化運動)의 편승이 없는 순수한 민주혁명으로서 이같이 성공하였을런지 매우 의심되는 일이다. 그러나 6·25를 통하여 이제는 우리들의 반공무장이 완전히 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모든 백성이 다 알아듣도록 공산주의는 충분히 비판되었는가? 재삼반성하여 또다시 남침의 기회를 주거나 궤변에 속아넘어감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불의(不義)와 우매함을 깨우쳐 개선(改俊)케 하고 주(主)의 사랑을 찾아 현세에서는 주를 칭송하는 기쁨에 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그들의 영혼구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