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너무 장황해지므로 성직자의 것은 이걸로 그치고 수많은 평신도 중 서울 시내 사는 어떤 평신도의 그 한 가지만 여기 인서하겠다. 그런데 여기 한마디 미리 말할 것은 위에도 말함같이 이숭녕 선생을 제외하고는(그러나 그한테선 아무 대답이 없었음) 일반 평신자에겐 일절 보낸 일이 없는데 그들에게서 이런 편지들이 옴은 필경 그 본당 신부를 통해 읽어본 듯하다.
『주신부님을 아직 뵈옵지는 못하였아오나 신부님의 저서 「선유의 천주사랑과 제사문제」를 통해 벌써부터 신부님을 경모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욱이 이번 「現行 새 工課는 반드시 옛 工課로 되돌아 가야 한다」의 평론을 읽고 통감하는 터입니다. 우리의 그 아름다운 기도문을 뜯어고친 후로 항상 불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더니 주신부님께서 이와같이 摘發公開 하시니 於心에 快합니다』라고 1959년 11월27일에 편지하더니 다시 12월4일에 또 편지하기를(여기는 한문은 그냥 국문으로 쓰겠다)
『…… 공과 환원 문제는 실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공과가 함부로 개찬된 후 구석 구석에서 단편적으로 비난의 소리가 있기는 했으나 아무도 公的으로 발론한 사람은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었읍니다. 尹형중 신부님의 공적이 실로 컸으나 공과개찬만은 큰 실수이었읍니다. 그러나 성직자나 교우를 물론하고 그 시정을 요하는 理論을 제창할 만한 치밀한 지식이 부족함과 잘못 거론하였다가는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개찬자와 원수가 될 것을 두려함과 또 하나는 교회 한 쪽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도 묵묵 방문하는 전통적 타성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오다가 박식과 용기의 소유자이신 주신부님의 경고로 인하여 큰 과오(過誤)가 시정될 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감격하여 일전에 소감을 드려 상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발송하신 부수가 너무 적습니다. 이것을 인쇄하여 성직자 전원과 유력한 교우들에게 널리 광포하여 여론을 이르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 하였을 때 나는 즉시 회답하기를 『그런 인쇄문제니 광포문제 등은 내게 의론할 것 없음은 나는 본래 일반 신자를 대상삼지 안했을 뿐 아니라 나의 할 일은 현행 새 공과에 오류(誤謬)가 있다고 지적함이 내 일이요 뒷처리는 주교님들이 하실 일이니 그런 문제 가지고는 내게 말하지 말라』고까지 부탁하고 나는 거기서 손 떼었던 것이다.
이 여러 서한 중에서 내가 특별히 느낀 바를 말하면 첫째로 윤형중 신부님의 그 과오를 솔직히 자인(自認)하는 그 「신자적 태도」이요 둘째는 ⑤에 말한 서울교우의 그 선견적 「예언」 등이다-내가 윤 신부께 받은 감명은 그것이 내 일생을 통하여 두 번째 느낀 바인데 그 첫 번 것은 1938년경 저 「홍콩오르도」(현재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직자용 교회 曆書)의 편수자(編修者)로 내게 소개된 M.Gerey사의 그 「학자다운 솔직성」인데 그는 문주교님과 동향인(同鄕人)으로서 그의 주교축성을 축하차 來邱하여 수일간 체류 중 여러 예전 문제 특히 다섯 가지 주요 문제를 가지고 약 일주일간 그야말로 국제토론(한국인은 나하나 뿐 그를 응원하는 불란서 신부는 문주교님을 비롯하여 약 6, 7인)이 벌어져서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양편이 서로 제각기 고집을 세우다가 승부(勝負)가 없이 서로 갈린 후 나는 별 관심도 없이 그냥 잊어버리고 있는 중 약 3개월 후 그 신부님은 그동안 자기가 철저히 연구한 결과를 타이프 한 장문의 수기를 문주교님을 통해 내게 보내왔는데 거기는 그때 우리가 토론하던 그 다섯 가지 주요문제 중 4문제는 주신부 의견이 옳다고 일일히 증명까지 해가면서 수긍(首肯)을 하는 동시에 자기 의견은 틀렸다고 솔직히 고백하였고 오직 한 가지만은 자기로서는 아직 수긍되지 않는다고 보류하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이미 잊어벌니 일이요 또 저편 자존심에 아무 도움도 될 것이 못 되지만 그와같이 자발적으로 고백하는 「학자다운 태도」를 보여주는 데는 아니 놀랄 수 없었고 지금도 가끔 그것을 펼쳐보면서 탄복하는 중인데 금반 윤신부님의 그와 비슷한 그 태도에 역시 감탄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통쾌한 것은 「새공과」의 개찬자가 분명 성직자 아님을 알게되므로써 늘 풀지 못하던 의혹-즉 적어도 가톨릭 신학을 배운 성직자로서는 도저히 이처럼 노골적인 쁘로데스당 정신을 「성교공과」에 들어놓지는 안했을 것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여 늘 고민하던 의혹-이 활짝 풀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야소교 목사였던 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수십년간 그 정신에 배인 자일 것인데 하는 의혹은 여전 풀지 못하고 지내왔음은 그 편지에 「어떤 교우가…… 주장하기에 최소한도로 고쳐 보라고 하였다」하였기 때문이었다-그랬더니 금반 서창제씨가 춘치자명(春雉自鳴) 하는 바람에 내게는 모든 의혹이 어름녹듯 다 녹고 말았다. (筆者=神父)
朱在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