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공산교의(敎義)라 할 때 그 진상(眞想)은 더욱 뚜렷해진다. 마치 그것은 종교적 신앙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공산주의는 한갓 주의=「이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철저히 그것이 하나의 무신적(無神的) 교리인 연유를 살펴보자. 씨는 이를 이같이 설명했다.
『공산주의는 고도(高度)로 조직화된 운동체(運動體)이다. 언제든지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자기확신(自己確信)의 이론으로 장비(裝備)된 자이다. 이는 또한 고도로 훈련된 체계(體系)이며 그 효과적 과업행사(課業行使)는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그 목표를 채우기에 증오(憎惡), 사기(詐欺), 무자비(無慈悲)를 그 방법으로 채용한다. 또 전투적 무신론(戰鬪的 無神論) 즉 적극적이요 신의 관념(觀念) 자체를 멸망시키려 드는 완전한 철학을 채용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또한 선량한 성질-오늘은 너무나 메마르지만- 충성·열성·한길에의 충성·자기 희생을 강요(强要)한다. 이를 자기 목표에 전용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또한 성인은 그 선한 의향(意向) 그대로 잡아다 흡인(吸引)할 수 있는 자이다. 최고의 지성인 가장 예리(銳利)한 자를 흡수하여 그들을 이용함으로 수백만 대중 위에 영향을 미처 주고 있다.
우리가 그 힘의 원천(源泉)을 인식한다면, 이미 알려진 바의 사실과 같은 그 정도의 공산주의자는 능히 해치울 수 있다는 수많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강력하고 효과적인 것은 그 조직의 형태에 있다. 그 활동하는 방법에 있다. 그 도덕적 윤리적 제한(制限)을 받지 않음에 있다. 당원이 간부(幹部)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는데 있다.
빈곤(貧困) 비천(卑賤) 사회불의(社會不義) 악조건(惡條件)은 공산주의를 먹여 살린 것이요 그 목표에 이용당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세우게 된 사실이 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는 그것이 제일 먼저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없다. 이는 영성(靈性)의 문제이다. 만일 이 사실에 이해가 간다면 어지해서 바로 이 세대에 그것이 만연(蔓延)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오늘 공산주의는 깊은 신앙을 그 인간의 바탕으로 하는 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본다. 깊은 종교의 신앙이 없고 선(善)을 저버리고 악으로 향하며 냉냉(冷冷)한 무신적 「맑스」주의의 강경(强硬) 종교로 넘어가는 대중 위에 공산주의는 번창함을 본다. 그리하여 저들은 진정한 종교에서의 정렬과 신심을 공산주의에 갔다 바치고 있다』라고 했다.
공산주의 비평의 새 1인자 인씨는 이같이 단정(斷定)하였다. 즉 공산주의는 하나의 종교이라고.
과연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생의 방향과 목적을 주고 있다. 그 때문에 방법이 이상화(理想化) 해놓은 것이 공산주의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고 죽을 수 있게 그 의의(意義)를 불어 넣어두고 있다.
공산주의는 그 신봉자들의 열성과 신심과 충성을 강요한다. 이런 것은 본래 종교에 속한 것이다. 또 신에게 속한 것이다.
현대인은 주의(主義)에 굶주리고, 믿어 의거(依據)할 바 그 어떤 신앙에 기갈(飢渴)을 느끼고 있다. 그곳에 공산주의는 나타나 그 근본적 필요(根本的必要)에 응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는 무신앙과 파탄(破綻)을 일으켜 주는 바로 거기서 오게 된 것이다.
<하이드>씨의 소론(所論)을 더 빌리면 만일 공산주의가 사회악(社會惡) 또는 사회적 불평등(不平等)에 기인(基因)했다면 그것이 시정(是正)되는 데로 공산주의는 없어지거나 약화되어야 할 것 아니냐? 공산주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오히려 그런 악(惡)을 영양(營養)삼아 성장한 것이다-고 했다.
이런 것이 바로 공산주의 일진대 여기 가장 완전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또 그것을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막는 길은 무엇인가.
공산주의는 사회적이요 정치적인 문제이기 전에 먼저 영성(靈性)의 문제임을 밝혔다. 그 때문에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영성의 근본에서 신(神)의 존재를 철저히 거부하는데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 그들은 신을 거부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있기 때문잉다. 따라서 이를 막는 방도 역시 진정한 종교에 있는 것이다. 즉 참된 신앙이 잘 전파되는 길밖에 없다 하겠다.
혹은 민주주의로 맞설 수 있지 않느냐고도 한다. 민주주의란 것이 공산주의 같은 철저한 신조(信條)이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자. 되풀이 하거니와 곤사주의란 확립된 「이데오르기」이다. 과연 민주주의도 그같은 「이데오르기」가 될 수 있을까. 공산주의처럼 그 신봉자의 인생을 좌우(左右)할 만한 방향과 목적을 줄 수 있을까. 문제의 근본은 여기 달려있는 것이다. 고(故)로 민주주의란 사회적 정치적인 여러 면(面)에 대처하는 방법이요 수단이며 생활방식에 더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가 「이데오르기」인 만큼 이에 대결(對決)할 「이데오르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5.16 군사혁명을 거쳐 진정 공사주의와 대결할 길을 찾고 있다. 여기 그 최선의 방법으로 빈곤(貧困)의 추방을 심각히 부르짖고 있다. 또한 적극적으로는 경제재건을 서둘으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바치는 노력의 50%는 「이데오르기」의 수립(樹立)에 경주해야 하겠다. 그 연고는 인간이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자이기 까닭이다.
오히려 「이데오르기」에 주력해야 하겠다. 살마의 위장은 항상 굶주릴 줄만 알지만 건전한 「이데오르기」는 날로 배부르게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데오르기」는 곧 그리스도교 안에 다 있는 것이다. 먼저 민중에게 반공(反共)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 줌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