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의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는 기도의 「말」의 중요성을 우리는 이번 「옛공과 논쟁」을 읽고 더욱 깊이 느낀 바 있다. 사실 「말」 한 마디의 잘잘못으로 그 뜻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필자 역시 신문교우로서 가톨릭에 대한 매력의 하나는 역시 성교회의 기도문이었다. 일찌기 「푸로태스탄트」의 「예배」라는 행사에서 실천되는 기도의 산문(散文)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산만(散漫) 내지 산란(散亂)하게 중언부언되는 웅변조(雄辯調) 내지 대사조(台飼調)에 실증이 났던 나는 「옛공과」의 째임새 있는 글에 정신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 이유를 이번에야 <주> 신부님의 설명으로 알게 되어 속시원하다. 그러나 「옛공과」의 성인 이름만은 원음에 가깝도록 고쳐지기 바란다. 어느 열렬한 구세군 사관 하나가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하여 열광적인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전」서 「세이 후라응시수꼬 슈도인」이라는 「일본가나」의 문패가 그를 성교회로 이끌어 들었다. 민족적으로 굴욕이였던 「고꾸고 죠요」(國語常用)가 이 열교인에게는 초자연적 영광이 되었다. 만일 그 문패가 「성 방지거 수도원」으로 쓰여졌더라면 아마 그 친구는 그러한 성총의 기회를 노쳤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예는 <분도> 대(對) <베네딕트>가 그것이다. 이 성인의 이름도 역시 교회 밖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 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 백화(白話)에 유래한 「습관 모병」의 「모병」(毛病), 「삼천기도」의 「삼천」(三天)과 그 외에도 있을지 모르는 그 등속의 말은 우리 국어의 입장에서 재고려함이 어떠할런지? 그 당시의 「중국어」를 통한 간접적 영어를 원문으로부터 직접으로 번역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너」라는 2인칭만은 참으로 올바른 재인식이 필요하다. 이 2인칭이야말로 가장 장중(莊重)한 경의(敬意)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너」는 시경(詩經)이나 이소(離騷)에 쓰인 「너-이」(爾)의 「너」인 것이요 「너-여」(汝)의 「너」가 아닌 것이다. 「일어」에서도 「난지」라 하고 「영어」에서는 「다우」(Thou)라 하여 우리 인간이 동배(同輩) 사이에 쓰는 「당신」에 대한 「너」와는 단판인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영세불변한 「너」의 뜻만은 「너」라는 사어(死語)로써 영구이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변(常變)하는 「현대」를 위하여 옛적 그 당시의 「현대」를 고집할 수 없다기 보다 해서는 아니될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동의 세계다. 그것도 현대의 아동 세계다. 다만 한 예만 들건대 「성부」 「성자」 대(對) 「아버지-아빠」 「아들-아드님」이다. 서양 아이들에게 그저 「Father」와 「Son」으로 호소되는 이 친숙한 표현과 우리 나라의 아이들에게 설명이 필요되는 「성부」 「성자」의 낯선 표현을 대조해 보라. 그래서 나는 유치원에서부터 국민학교 2,3학년 정도까지 사용될 어린애말의 특수한 이 문답책과 기도책이 새로 편찬 제정되었으면 한다. 다행이 우리 교내(敎內)에 아동 문학의 산문가도 시인도 작곡가도 있다. 신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 분들이 능히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림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 효과는 「나의 주일 미사」의 그림이 어른에게 주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특히 말을 배우기 싲가할 때의 「어린애말」로 된 기도문이라기 보다 「기도말」이 동요의 형식으로 제정되었으면 우리 가정의 종교 교육이 얼마나 더 잘 될 것이며 어른들은 어린애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에 또 한 가지 따르는 생각은 어른들만을 표준으로 한 공과는 전례적인 공식 기도문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사어」르 고집할지언정 사사로 간구하는 기구는 자기가 지꺼리는 사투리로 우리 마음 속에 전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공식 기도용이 아니라 가정에서 조만과 끝에 사사로 영송할 수 있는 현대적인 기도문이 따로 있으면 위에 말한 「너」와는 달리 「당신」 혹은 「님」으로 호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의 시편」이 나왔으면 우리 신앙 생활이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
金益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