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우리민족의 가장 즐거운 명절이다.
일본제국의 가혹(苛酷)한 질곡(桎梏)에서 해방된 기쁨을 기념하는 동시에 한국가톨릭신자에게는 우리가 숭모하는 성모 마리아의 몽소승천첨례를 지내는 것이다.
삼처만의 한국민이 다 이경절(慶節)을 두가지 뜻에서 즐거워할 날이 오기를 우리는 먼저 기다려마지 않는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존경을 론함에 있어서 무신론자나 무종교이에게 보다도 주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는 많은 「푸로테스탄트」에게 더 역설(力說)해야하는 이 비애를 얄궂은 운명에다 맡기어야 하겠는가? 우리는 먼저 과거에 입은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순수한 심정에서 성모 마리아 존경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기도중에서 성모마리아의 전달을 빌고 또 각가지 예절에서 성모께 존경을 드림을 기뻐하는 반면에 「푸로테스탄트」에서는 이런 종교행동을 반기독교적이라 하며 혹은 가톨릭은 「마리아교」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존경이 기독교적이냐 반기독교적이냐 하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앎으로써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디론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하는 신앙에서부터 우리는 성모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며 행동으로서는 성모의 전달을 통해서 지성지존(至聖至尊)하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하기 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현적(假現的) 인간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닥쳐올 수난을 눈앞에 보고는 피땀을흘리는 인간이었으며 「가나」촌(村) 잔치에서는 많은 손님에게 맛좋은 술을 주고 신랑)新郞)을 즐겁게하는 인간이었으며 성전을 더럽히는 환전(換錢)꾼과 장사치를 볼 때에는 채찍을 들고 그들을 쫓아내는 의(義)로운 남아였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양부(養父) 요셉의 「톱질」과 「대패」를 도아드리는 양자(養子)였으며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에 태어난 아들과 같이 효자로 살거나 불효로 살아야 하는 윤리규범(倫理規範) 속에 속하는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33년이란 짧은 생애에 30년이란 대부분의 생활을 고요한 「나자렛」촌에서 성모 마리아께 복종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한줄로 기록하였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고 하드래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신앙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불효를 상상이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고교(古敎)의 잠정적(暫定的) 율법(律法)이라도 폐기(廢棄)하지 않고 완성케 하려고 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연법인 부모께 대한 효성을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크리스찬」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다. 그러면 성모께 대한 존경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다.
만일 이것을 아직도 부정하고 가톨릭교를 「마리아교」라고 한다면 아직도 우리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하였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여신(女神)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싀도께서 설교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탄복한 소박한 부인의 외침을 우리는 들어야 한다.
『당신을 품는 배(腹)와 당신을 먹인 젖(乳)은 복되도다.』 이 얼마나 수사와 가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성모께 대한 찬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며 효자였다 『효자』라는 말은 동양적 술어이며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말이다. 그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고 효자·예수 그리스도를 즐겁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한 기본적 심정을 버리고 성서를 만번 통독(通讀)하여도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갑열」천사를 성모 마리아께보내어 아래와 같이 축하하게 하였다.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중에 너 총복을 받아 계시도 소이다』
(누가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