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사(每事)에 있어서 자신을 갖고저 한다. 자신은 인간 완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요인(要因)이 되는 동시에 또한 매우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 자신이 서게 되면 독립된 영웅적인 자아(自我)를 발견하게 되고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自信)과 자기완성을 혼돈한다. 일단 자신이 서면 그 자신하는 바가 옳든 그르든 간에 자기 존립의 기점으로 삼아 대담스럽게 자기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다. 모든 과거(過去)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자기 체계를 세워보려고 한다. 이미 회의(懷疑)와 비판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 신뢰와 확신만을 앞세우려고 한다.
실력과 판단에 대한 불안이 생길사록 더욱 자기를 과신(過信)함으로써 독단과 고집으로 흐른다.
이러한 경향은 유달리 권위주의(權威主義)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히는 동양사회의 지도자층에 많다. 동양사회가 말하는 지도력을 가진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판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정의와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먼저 모든 백성이 무조건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러했기 때문에 올바른 비판을 하는 신하(臣下)는 불에 태워 죽이고 혹은 사약해서 죽였던 것이다.
혁명국회가 개회되고 제2공화국의 새 정부가 서는 이때에 우리는 종래의 사상과 사고방식(思考方式)에 대한 혁명이 또한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제2공화국을 축복할 수 없다.
물론 지도자는 제각기 맡은 일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지도력이 생길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자신의 기반이 윤리(倫理)와 정의 또는 진리 위에 서 있어야 하며 권위와 영웅심 위에 서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지도자는 나서서는 자신을 가지고 백성을 지도하고 들어와서는 보다 자신있는 자아(自我)를 발견하기 위하여 반성하고 비판하고 연구하여 자기발전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 대가연(大家然)하고 나선 사람이면 모두 침체(沈滯)된 인간이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사람들이다. 고집과 권위에 사로잡혀 내일(來日) 없이 사는 독설자들이다. 그러한 사람이면 혁명이 무엇인지 알리도 없고 더구나 혁명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러한 논의(論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자신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혹시 신앙생활에 자신을 가졌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위험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은 극히 평범하고 손쉽게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극치(極致)는 교리를 많이 알고 경문을 잘 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리스도화(化)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뉘 감히 스스로 그리스도화 했다는 자신을 가지고 나설 사람이 있겠는가? 수계생활(守誡生活)은 신앙생활의 초보이면서 매우 어려운 것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도덕인(道德人)이라 할지라도 제 힘만으로 인간의 힘만으로는 완전한 수계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수계 이상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신앙은 천주께서 정하신 금지규정이다. 명령규정을 지킴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천주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오 그리스도화 하려는 무한한 자기발전인 것이다.
예수께서 제가 의인(義人)인줄로 스스로 믿고 다른이를 업신 여기는 자들에게 비유(比喩)를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기구하려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서이」요 하나는 구실받는 아전이라. 「바리서이」는 서서 이렇게 기구하되 천주여 나 네게 감사하옵기는 대저 내가 토색질(金品强要·窃盜)하는 자와 비리짓(非理·不正)하는 자와 간음하는 그런 사람과 같지아니하옵고 이 아전과 같지도 아니하오며 매주일동안에 두번씩 엄재(大齋)하고 나 가진바 모든 재물의 십분의 일을 바치나이다 하고, 아전은 멀리서서 감히 눈을 하늘로 들지도 못하고 오직 제 가슴을 치며 이르되 천주여 나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으니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는 저(바리서이)에게 비겨 의인이 되어 제 집으로 돌아갔으니……』 하였다. (루가복음 18, 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