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반박하고 이론적 비평을 가하기란 쉬운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반대를 위한 반대, 혹은 반대를 위한 이론으로 오인(誤認)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공산당이 큰 힘을 발휘하는 또 하나의 연고는 그들은 항상 이론(理論)과 실천(實踐)을 합치(合致)하기에 무서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있다. <레에닌>은 말했다. 『이론이 없는 실천은 맹목(盲目)과 같고 실천이 없는 이론은 불임(不妊)과 같다』라고.
이말은 비록 적(敵)의 소리이지만 귀담아 들을만한 데가 있다. 적이 이를 신조(信條)로 삼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병법(兵法)에도 「知彼知己 百戰百勝」하지 않았는가.
<비오> 11세의 「과드라제시모·안노」(社會回勅 無神的共産主義를 __함)는 결코 이론만을 전개하지 않았다. 회칙 후반(後半)은 교회는 마땅히 사회문제와 경제문제를 다스릴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강력히 주창했다. 사회 및 경제적 제문제의 개혁과 재건(再建)을 위한 기술적인 것을 다루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러한 문제의 바탕에 놓여진 근본문제인 원리원칙의 어느 특수한 정오(正誤)에 대한 것에 권위(權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하(以下) 동 회칙의 몇몇 내용을 추려 보겠다.
경제생활은 경제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같이 도덕은 도덕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실천면은 과연 절연(絶緣)된 것이겠는가. 경제생활은 도덕과 무관(無關)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 흔히 방도(方途)에서 마저 큰 오(誤)를 범하고 있다.
이를 다음같이 명백히 해명(解明)하였다.
경제는 한 특수분야이다. 경제원칙은 이성(理性)의 작용으로 얻은 하나의 발견이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는 전체에서 볼 때 한 특수 부분인 것이다. 그것은 전체가 아니다. 전이성(全理性)도 아니다. 한 특수한 목적과 수단은 마땅히 전체적 목적과 수단에 종속(從屬)해야 한다. 한 적은 목적과 수단은 큰 목적과 수단(종국적) 앞에 순종(順從)해야 한다. 이런 원칙에서 <레오> 13세와 가톨릭 신학자들은 소유권(所有權)을 이같이 설명해왔다. 즉 소유권은 두 개의 성격을 가졌다. 그 하나는 개인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선(社會善)에 관한 것이다.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첫째 천주께서 그 개인의 필요에 응해주기 위해서 또 그 가족의 요구에 응해주기 위해서 주신 바이지만 이와 동시에 전인류를 위해 또 이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 정해진 권리인 것이다.
이 소유권에 대한 2중(2重) 성격을 잘못 쓰면 2중위험이 있다. 첫째 소유의 사회적 공공(公共)적 정신을 잃어버리면 「개인주의」에 떨어질 것이요, 둘째 소유의 권리를 무시(無視)하면 「집단주의」의 가혹한 지경에로 몰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때문에 항상 교회의 가르침에 기울여야 하며 교회는 이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한 것이다.
<레오> 13세는 이를 더 분명히 설명했다. 소유는 ①소유할 권리와 ②사용할 권리로 구분된다. 소유할 권리는 소위 교환(交換)의 정의에 의한 규측대로 다사려지고 보호될 것이며 소유한 바의 사용은 이는 덕성(德性)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정당히 쓸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악용된다, 혹은 오용(誤用)된다는 까닭으로 인해 재산의 소유권이 박탈되거나 불인(不認)될 수 없다. 소유의 권리가 그 권리의 정당한 행사에 의해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유권의 개인적 성격을 약화하거나 실질적으로 멸망하는 짓은 중대한 과오(過誤)이다. 그러면서 크게 강조할 것이요 높이 평가 할 것은 이 소유권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이다. 사회생활에 있어 첫 의무는 그 가진 바에 대한 권리와 그 사용인 것이다.
여기서 「소유」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하자는 것은 아니다. <비오> 11세의 사회회칙 「과드라제시모·안노」에 수록된 소유라는 대목을 몇군대 인용했을 뿐이다. 이같은 교회의 관념(觀念)간에 차질이 있지 않는 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론 없는 실천, 실천 없는 이론을 다시 상기해 보자. 적은(공산주의자) 이를 그들 내부에서 무섭게 강조하고 있다 하지 않는가.
먼저 「이론 없는 실천을」 면할 길을 찾기로 하자. 본란은 수 개월을 두고 가톨릭 사회교의(敎義)를 강조해 왔다. 다행히 서울의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는 오는 전국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공산주의」를 규명하는 연구위원회를 열고있다 한다. 그 외에도 몇 학생크럽은 진실한 연구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이렇게 학생운동의 일부에 그칠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톨릭 사회무제 연구소, 가톨릭 사회과학연구기관을 설치하자는 소리는 작금에 있은 것이 아니다.
「레룸·노바룸」이나 「과드라제시모 안노」와 같은 주옥(珠玉)같은 원전(原典)을 다만 소유하고 있으므로 족하겠는가.
「실천이 없는 이론」을 면할 길은 반공(反共) 구호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멸공(滅共)의 행동을 일으키는데 있다. 이 길 역시 생활의 주변(周변)에서 찾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성찰(省察)할 때 「남이 나로 인해 범한 죄 있을」것을 뉘우친다. 생활의 주변에서 마음쓰자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나로 인해 공산주의자가 된 자는 없을까. 아무튼 행동을 동반시킨 신앙이 돼야 함같이 이론=실천의 반공체제(體制)를 조속히 갖추도록 해야 한다. 가톨릭 신자보다 더 철저한 반공인이 없음을 선양(宣揚)할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