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그 진상(眞相)을 파악할 것을 강조했었다. 그러면 그 진상이란 눈으로 본 그대로를 뜻하는 것일까. 가령 공산치하에서는 개인이 라디오를 못 가진다던가 카메라·시계를 소지할 수 없다던가 하는 그런 것만으로 공산주의의 진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런것은 지극히 피상적(皮相的)인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주의를 한 「이데아」로서만이 아니라 그들 공산주의자들이 실행하고 있는 「방법」과 「의향」을 또한 그대로 파악해야 하겠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농민에게 일용할 양식을 약석할 것이다. 지식인 문화인에게는 평화를 표방할 것이다. 경제부흥을 무섭게 부르짖을 것이다. 만일 이런데서 공산주의의 방법 및 의향을 파악하려 든다면 그들 술책(術策)에 쉬이 넘어갈 도매금 대상(對象)이 되고 말겠다. 공산주의의 가정관(家庭觀)에서 그 진상을 살펴보자.
가족문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공산주의 ABC』에서 벌써 『프로테타리아 국가의 중대과업의 하나는 아이들을 저들 부모로조차 반동영향(反動影響)을 받는데서부터 해방시켜 놓는 일이다』라고 분명히 일러놓았다. 부모와 자녀간의 타고난 (自然法으로 정해진 바를)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엥겔스>는 이를 이같이 표현했다. 가족은 『감정과 가사투쟁의 복합(家事鬪爭의 複合)이라고. 대단히 어려운 표현같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가족은 사회주의 건설에 지장이 되니 가족이란 인간관념부터 없애자는 것이다.
가족은 물론 가정이란 계념도 그러하다. 씨의 설명을 빌리면,
『가족에의 「맑스」적 계념에 대처(對處)하여 이를 여지없이 분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회의 불변하는 성사(聖事)로서의 결혼윤리이다. 이는 한 점도 더 하지도 덜하지도 못하는 불변의 교리이다. 나의 경험에서 말하거니와 그때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교회가 가정·가족을 방위하는 굳건한 입장을 바라보고 이보다 훌륭하게 들어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는 공산당이 인간의 자연권(自然權)을 짓밟는데 대한 반발이었다.』
공산주의에 있어 애정(愛情)이란 단지 물질적인 것이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선 인생관을 어디서건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곧 「성」인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참사랑은 반동(反動)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술어(術語)를 빌리면 건전한 증오(憎惡)는 신세계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그것은 곧 그들의 신질서(新秩序)를 가저오는 의식적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같이 공산사회의 가족, 가정, 애정 등을 말하면 설마 그럴수야 있으랴 그것은 반공선전상 하는 말이겠지 하는 말을 곧잘 듣는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의향에 무지한데서 온 것이다.
어째서 그들에게는 증오란 것이 필요한가.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째서 반동이 되는가. 그들은 왜 『건전한 증오』를 재촉하고 있는가. 그 까닭은 단순하다. 그들의 목표가 혁명에 있으니만큼 거기 도달하는 계급간의 투쟁이 있어야 하고 그런 투쟁이 있자면 증오가 반듯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나치스」에서도 그러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신질서(新秩序) 건설의 수단으로 증오를 썼다. 「나치스」의 역사는 증오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들의 멸망은 인류사에 큰 교훈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는 또다시 증오에 시달리고 있다. 조직된 증오 그것은 공산주의인 것이다. 현대에 증오가 부족하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여기 현대의 위기(危機)를 솔직히 느껴야 한다. 증오는 충만되었고 그것은 또한 조직화되고 있는데 사랑은 빈곤하고 또한 조직할 줄 모르고 있다. 여기 우리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 증오로 조직된 공산주의에 사랑으로 조직된 그리스도교의 대결은 결국 현대의 운명을 결(決)하게 되리라. 현대의 위기는 실로 여기 달려 있음을 더 말할 것 없다.
현대의 위기, 여기서 우리는 조금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위대한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회란 어느 성숙기(成熟期)를 향해 성장하듯 장만되고 있다.
사라으이 결정(結晶)인 「그리스디안」은 그 안으로 철저한 것을 선양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사랑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하겠다. 그 방법은? 이제 새삼 애덕의 실천을 강조함 보다 다같이 뉘우침의, 다짐의, 결심의 새 기회를 가져 일신(日新)할 수 있어야 한다. 우일신(又日新)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으로, 우리는 공산주의가 침투해 들어올 「루우트」를 막을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을 가정 및 각자의 정신에서 고찰해 본 셈이다.
어쨋든 공산주의가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하겠다. 그러자면 이 가족·가정문제와 같이 저들이 철저히 부정하는 바를 우리는 철저하게 긍정해야 한다.
중공(中共)의 인민공사제도는 사상(史上) 미증유(未曾有)의 완전한 가족·가정의 해산(解散)을 목표로 한 것이다. 부모, 자녀, 남편, 아내의 관계는 오직 인민공사의 정한 규측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인민공사에 모든 노력과 희생과 생명을 바치는 것으로 최대의 영예를 삼으라는 것이다. 중공 이외의 공산국가에서는 이런 가혹한 제도는 없지만 <맑스·레에닌>의 교의대로, 그 원리에서 살고 있어 여지 없이 짓밟히고 있다.
가톨릭적 가족·가정 그리고 결혼윤리가 아니고서는 공산주의와 정면(正面)으로 맞선 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공산주의 비판에 있어 그들의 집단제도 비인격적 인간대우, 자유의 박탈 등을 열거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데서 비판해 가자. 또 막연히 반대하는 것으로 그칠 것은 아니다. 반대 했으면 옳은 것을 또한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처럼 반공구호를 세차게 부르는 때는 없었다. 이런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지식은 빛날 수 있다. 그것은 일일히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최종의 대답이요 해결책이 되기 때문이다.